태평성대를 선언하다.
구양순(歐陽詢, 557 - 641)은 중국 수 · 당나라 시대에 살았던 인물인데, 그의 삶이 후반기에 접어들었을 때의 황제가 태종(太宗, 626 - 649 재위)이었다. 태종은 서예를 좋아하고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물로, 그가 다스렸던 시기는 물론 당나라 시대 내내 뛰어난 서예가들이 많이 등장했다. 구양순은 바로 그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구양순의 서예를 잘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작품은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632)으로, 이 작품은 고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찰에 가면 큰 스님들의 삶을 새겨 놓은 거대한 비석이 있는데, 거기에 쓰인 글씨의 모양을 보면 구양순의 글씨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글씨의 가장 큰 특징은 댄스그룹 ‘저스트 절크’의 군무처럼 전체가 마치 하나처럼 움직이는 통일성 안에 수많은 변화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자 자체의 구성도 견고하지만, 글자와 글자를 연결하여 전체를 이루는 구성은 비석에 새겨진 긴 문장을 입체적으로 떠받치고 있다. 서예에서는 작품의 구성을 장법章法이라고 하는데, 그림에서의 구도와 비슷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화가 겸재 정선이 실경을 그리면서도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특징이 되는 부분을 확대하거나 재배치하는 것이나, 단원 김홍도가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하는 것처럼, 서예에서도 글자와 글자의 간에 균형과 조화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 예를 들어, ‘교教’와 ‘지之’처럼 글자의 복잡도(획수)에 따라 화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를 퍼즐을 맞추듯 글자를 정교하게 배치하여 가까이서 보면 한 치의 빈틈이 없고, 멀리서 보면 박력이 넘치는 것이 바로 구양순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구성궁예천명>은 정관 6년(632) 70세가 넘은 구양순이 황제의 명령으로 쓴 작품이다. 구성궁은 원래 이름은 인수궁으로 수나라 황제의 별궁이었다. 수나라 황제들은 이 곳으로 피서를 오곤 했었는데, 수나라가 멸망하고 잊혀졌던 이곳을 당나라 황제 태종이 수리 보수하여 구성궁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수리하는 과정에서 물이 솟아오르자 이를 기념하여, 구성궁의 역사와 물(예천)이 흘러나오게 된 과정을 위징(魏徵, 580 - 643)으로 하여금 글을 짓도록 하고, 구양순에게 명해 쓰게 한 것이다. 위징은 잘 알려진 것처럼 황제에게 목숨을 걸고 직언하여 황제가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도와 나라가 번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태종은 위징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는데 그만큼 위징은 황제에게도 당나라에게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태종은 이 비명碑銘을 통해 태평성대가 마침내 도래했음을 선포했다. 그 선포에 위징의 목소리와 그를 담을 그릇으로 구양순의 글씨를 선택했던 것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쇠퇴한다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구양순이 쓴 이 작품은 고도의 집중력이 느껴질지언정 쇠퇴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안으로 내재된 강력한 에너지가 유려하게 흘러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 하나하나에 가득 차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통일된 나라가 세워지고 평화를 선언하는 글의 한 자 한 자는 화려하기보다는 견고하고, 풍요롭기보다는 엄정하다. 극심한 전쟁과 삶의 고통, 그리고 이제 겨우 얻은 평화를 모두 경험한 노구의 구양순에게는 ‘태평太平’, 평화와 번영은 누리기보다는 지켜 내야 할 것이었다. <구성궁예천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제의 업적과 그가 얼마나 훌륭한 지도자인지를 빼곡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이 선언문의 가장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맺음 한다.
持滿戒溢 念玆在玆 永保貞吉
가득 차 있을 때는 넘칠 것을 경계한다. 이것을 생각하고 이것이 있으므로 곧고 길함이 영원히 보전될 것이다.
태종은 이 경계하는 삼엄森嚴한 마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그는 645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것처럼 참혹했다. 야사에는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고 돌아오면서 ‘위징이 있었다면 나를 말렸을 것인데……’라고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러나 당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300여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그 간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있었다. 구양순이 쓴 이 비명碑銘도 탁본으로 전해져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따라 배우고 쓰고 쓰고, 또 썼다. 위징과 구양순의 염원이 담긴 이 작품은 그렇게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의 염원이라는 것은 헛된 듯해도 이렇게나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