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307?-365?), <난정서>

온전히 가지고 싶은 아름다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by 검은 산


조선시대는 겸재 정선, 르네상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이름이 있다. 마찬가지로 서예에서도 가장 많이 불리며, 가장 중요한 이름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왕희지王羲之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 <난정서蘭亭序>(353)는 가장 우아한 아름다움이 완성된 곳이며, 뒤에 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돌아가고 싶어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왕희지는 동진시대에 태어났다. 한나라가 망하고, 위,촉, 오 삼국기를 지나, 서진이 망하고 세워진 나라가 동진인데, 이 시대에 한족들은 북방 민족의 침략을 피해 양쯔강을 건너 대거 남쪽으로 이주했다. 양쯔강을 건넌 귀족들은 새로운 땅에 적응하는 한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혼란스러웠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시대였다. 왕희지도 남하한 귀족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연으로 돌아가 숲과 강가를 거닐며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지만,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관리로 일했다. 그러다 무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상관으로 부임해서 자신을 괴롭히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관직을 던지고 자연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왕희지의 시대에는 왕희지처럼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많았다. 또한 왕희지 이전과 이후에도 글씨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세상에 왕희지는 오직 한 명뿐이며 그의 위치는 아무도 넘볼 수 없다. 그렇게 된 데에는 ‘정관지치貞觀之治‘로 잘 알려진 중국 당나라 태종이 그를 열렬히 사모했기 때문인 이유가 가장 크다. 황제는 글씨를 잘 쓰는 저수량(褚遂良, 596 - 658), 우세남(虞世南, 558 - 638)과 같은 신하들에게 난정서를 똑같이 여러 번 베끼게 했으며 이를 다른 대신들에게 나눠주었고, 왕희지의 작품을 광적으로 수집했다. 특히 <난정서>는 원래의 소장자를 속여 빼앗아 왔고, 이 일화는 <소익잠난정도蕭翼賺蘭亭圖>라는 그림으로까지 그려져 현재까지 전해지며, 그렇게 얻은 <난정서>를 죽을 때 무덤까지 가져갔다는 일화가 있다. 그렇다면 왜 중국 역사상 가장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던 당 태종은 왕희지의 서예, 특히 <난정서>를 그토록 원하고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 했을까?


서예 작품들은 크게 자신이 지은 문장을 직접 쓰는 경우가 있고, 기존의 명문들을 가져와 쓰는 경우가 있는데 <난정서>는 전자에 속한다. <난정서>는 왕희지가 영화 9년(353) 3월 삼짇날 수계사修契事를 기념하여 글을 짓고 썼는데, 모임의 분위기, 왕희지의 감상, 그리고 글 너머의 시대적 배경이 어우러져 마치 우연히 얻은 인생 컷처럼 왕희지에게 서예의 역사 속에 아무도 넘보지 못할 지위를 부여했다.


왕희지 서예는 ‘전아典雅’하다는 말로 정의되는데, ‘모범이 되는 우아함‘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우아하다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가 중요했던 것은 이 시대가 귀족의 시대였기 때문이며, 한문이라는 문자가 ‘기록’이라는 본질적인 목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영화 구 년 계축년 늦은 봄 초에'로 시작하는 이 글은, 모임 장소와 모인 이들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날 하늘은 깨끗하고 공기는 맑았으며, 은혜로운 봄바람은 더없이 따스하고 부드러웠다.'라고 노소 불문하고 물가에 앉은 이들의 주변으로 흐르는 자연의 온화하고 청명한 분위기를 그린 듯 적어내고 있다. '눈을 놀리며 마음 가는 대로 생각을 달려 보고 듣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기에 충분하니'라는 구절은 왕희지와 그 친구들이 어떤 마음으로 '회계산 북쪽 난정'에 모였는지 말해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권력투쟁도, 전쟁도 없이 오직 ‘결국에는 다함에 이름에야!’라는 표현처럼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소중히 기록하여 남긴 글이 난정서인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와 전쟁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웠던 50여 년의 세월은 왕희지에게 '우러러 우주의 한없이 크고 무한함을 보고, 고개 숙여 지상 만물의 무성함을 보며', '과거의 즐거웠던 일이 짧은 순간에 낡은 자취가 되어 버리니'와 같이 삶을 관조적으로 받아들이게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왕희지는 분명히 삶과 죽음을 같은 것이라고 어차피 '모두가 죽는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죽고 사는 것이 같다는 말이 허황하고, 팽조(700년을 살았다고 하는 인물)가 일찍 죽은 이가 같다는 말도 함부로 지어낸 것이라 하겠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왕희지는 이 <난정서>가 이렇게 유명하고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만 따뜻한 봄날에 뜻을 함께한 사람들과의 평화로운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담담히 짓고 썼을 뿐이다. '세상이 달라지고 세태도 변하였으나 감흥을 일으키는 까닭은 그 이치가 하나이니, 나중에 보는 자는 장차 이 문장에 감회가 있으리라'라고 한 왕희지의 말은 삶의 보편성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어떤 감회를 가질 것인가는 시대마다,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혼란했던 중국을 통일하고 긴 역사속에서도 가장 번영했던 나라를 만들었던 태종도 <난정서>를 보면서, <난정서>를 쓰면서, <난정서>를 소유하면서 왕희지가 말하는 감회의 한순간을 영원히 붙잡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왕희지의 <난정서>는 서예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그 이유는 글자 하나하나가 예뻐서가 아니다. 수없이 많았을 수계사 중에서도 왕희지가 쓴 <난정서>가 담고 있는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것을 써내려간 시간과 공간이 아름다운 그릇에 담겨 마침내는 보편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깊이 공명한 강력한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서예가 가진 보편성과 특수성의 본질이다. 그것이 서예를 이해하는 것을 쉽게도 어렵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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