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에 바치는 숭고한 의미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가전제품 중에서 최근 유행하는 것 중 하나는 단연 식기세척기이다. 그것에 대한 만족감을 여느 주부들은 ‘식세기 이모님’이라고 칭한다. 건조기 또한 한 몫 하지만 삼시세끼에 뒤따르는 세끼 분량의 설거지를 한 번에 해결해주는 식기세척기의 만족도가 그만큼 더 높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꺼이 식기세척기에 ‘이모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일 거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아직도 식기세척기가 없다. 식기세척기 구매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4평 타워형 구조의 아파트는 주방이 좁아서 식기세척기를 들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30평대로 이사 가면 그때 사자.” 라며 우리 부부는 합의랄 것도 없이 둘다 이미 식기세척기 구매를 당연히 정해두었다. 하지만 막상 30평대로 이사를 오면서 넓어진 주방에 식기세척기를 두기에는 양자택일이었다.
공간을 내어주고 이모님을 들이느냐, 미니멀한 간소한 삶을 지키느냐.
이사를 하면 식기세척기 구매는 당연한 걸로 여기고 있었건만 막상 새로운 가전제품의 구매는 선뜻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몇 달이 흘렀다. 설거지를 하던 남편이 볼멘 소리를 냈다.
“그러지 말고 우리도 식기세척기 하나 사자.”
남편의 볼멘 소리에 선뜻 “그래, 사. 대신 당신이 알아봐.”라며 마치 사고는 싶었지만 알아보기 귀찮아서 사지 않았던 듯 쉽게 응수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 일이다. 그리고 오늘도 난 여전히 내 손으로 직접 설거지를 한다.
식기세척기를 구매하기 위해 실제로 남편은 다양한 제품의 스펙을 비교했다. 하지만 둘 다 구매를 포기하게 된 이유는 6인용을 사자니 사이즈가 애매했던 것. 그래서 이왕 살 거 빌트인으로 사자며 스케일이 커졌다. 그리고 빌트인을 사자니 설치할 고민이 되었다. 이런 저런 궁리 끝에 싱크대 하부 수납장 한 칸을 식기세척기에게 내어주기로 하였다. 그러자 또 다시 우리를 망설이게 했던 건 자가가 아닌 전세살이의 설움이라고나 할까. 수납장을 뜯어내고 거기에 식기세척기를 넣고나면 뜯어낸 수납장을 전세살이 하는 내내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완강하게 반대의사를 던졌던 이유는 수납장 보관이 아니었다. 금전적인 이유도,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고자 했던 이유도 아니었다.
구매를 망설이다 돌연 반대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설거지를 하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내가 직접 설거지를 하는 대신 식기세척기에 넣는다. 그럼 나는 남는 시간에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그 시간을 얼마나 더 잘 활용할 수 있을까. 전업주부로 사는 내가 허둥지둥 바쁜 아침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론은 단순했다. 기껏 해봐야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핸드폰이나 더 보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온수를 틀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남편은 아침을 먹지 않고 출근하기에 아침에 나오는 설거지거리는 고작 아이 밥숟가락과 내 숟가락, 아이 국그릇, 내 국그릇. 서너 가지가 전부다. 이걸 위해 식기세척기를 돌리기에는 아깝다. 점심 때는 나 혼자 먹으니 그릇이 나올 것도 없었다. 그러면 저녁 설거지거리가 나올 때까지 아침 그릇은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아침, 저녁 그릇이 또 따로 필요하다. 식기세척기를 들인다 생각하니 수저 한 벌씩, 국그릇 밥그릇도 여분이 더 필요했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상념에 빠져 있던 순간 이미 설거지는 끝났다.
아침이라 멍한 시간에 아이를 등교시키고 돌아온 집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설거지 하는 시간은 하루를 여는 의식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식탁 위에 흐트러져 있던 그릇을 싱크대에 넣고, 온수를 튼다. 고운 파스텔 톤의 도자기 그릇에 묻어져 있던 양념이 수세미질 한 번에 닦여져 나간다. 그 순간 장갑 낀 내 손에 느껴지는 온수의 따뜻함. 무엇보다도 설거지를 하면서 생각의 고삐를 풀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두둥실 떠다니는 상념의 시간이 좋았다. 마지막으로 행주로 식탁에 흘린 음식물과 싱크대 주변에 튄 물기를 닦는다. 그렇게 하루를 연다.
식기세척기는 손수 설거지를 하는 내 마음이 거절했다. 귀찮은 집안일로 분류되는 하나의 일이지만 나는 그릇이 깨끗하게 닦여져 가는 과정이 좋다는 사실을 식기세척기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