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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우진 Dec 02. 2021

몸뚱아리

다이어트에 집착하는 이 육신은 하찮은 육덩어리일 뿐이던가

  

우적우적. 배고픔의 감각은 정기적으로 찾아온다. 살을 빼겠다는 다이어트의 결심은 허기짐이라는 인간 본성의 감각으로 무뎌지기 일쑤다. 그렇지만 쉽게 무너질 나는 아니지. 흥. 

우적우적. 우악스럽게 씹어대지만 사실은 블루베리다. 비어 있는 위장은 채우되 건강하게, 저칼로리로. 

우적우적. 씹어먹는 모습은 기름좔좔한 양념갈비를 상추에 얹어, 달짝지큰하면서도 고소하면서도 맵싸한 쌈장을 묻혀 한 쌈 가득 넣어 양볼을 불룩하게 하여 먹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그렇지만 난 다이어터니까. 

블루베리로 배를 채운다는 건 위선이다. 블루베리로 아무리 배를 채워도 기름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블루베리를 우적우적 씹어먹어도, 여전히 배는 고프다. 

그래서 또 냉장고 문을 연다. 역시나 다이어터라는 가증스러움을 표현하는 요플레다. 

난 다이어터니까. 이깟 허기짐으로 무너질 나는 아니지. 

다이어트에 집착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깃들어 있는 이 육신은 아름다운 인체의 신비를 담고 있는 몸이 아니라 “몸뚱아리”가 된다. 

차고 넘치는 지방들로 그득한. 마치 쓸모 없는 잡동사니들을 버리지도 못한 채 미련으로 가득채워 둔 지저분한 창고와 비슷하다. 

연예인들은 저렇게 늘씬하고 길쭉한데, 어째서 이 놈의 몸뚱아리는 짜리몽땅하고 오동통한지. 원망스럽다. 

비계가 트실트실 뭉쳐서 우둘투둘한 셀룰라이트의 자국을 남긴 허벅지는 내가 봐도 꼴사납다. 마치 게을러서 집을 정리하지 않아 뒤죽박죽이 된 거실 바닥처럼. 먼지가 나뒹구는 침대 옆 구석처럼. 

오늘의 이 몸이 어제의 그 몸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살을 뺀다한들 내일의 내 몸뚱아리는 오늘의 이 몸뚱아리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몸을 향한 나의 이 편견. 몸은 정리해야 할 지방으로만 가득차 있는 불필요한 덩어리인 것 같은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에 딱 좋은 말이 “몸뚱아리”이다.      

내가 이렇게 몸을 폄하하게 된 건 미디어의 영향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더 날씬하고, 더 마르게, 키가 큰 쭉쭉빵빵의 연예인들로 가득찬 티비 속 세상은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이 몸뚱아리를 더욱 더 비천하게 만든다. 

하지만 모든 이가 자신의 몸을 이렇게 폄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 생각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엄마다. 

지나고 보면 모든 원망과 비난은 엄마에게로 돌아간다지만 어째서 몸뚱아리에 대한 이 비난조차 엄마를 향할까. 그러고 보면 엄마라는 존재는 참으로 구슬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역시나 엄마다. 

왜? 엄마가 이렇게 낳아줬으니까. 

그러면 네가 빼면 되지. 

맞다. 엄마가 이렇게 낳아줘서 몸뚱아리에 대한 폄하가 시작된 건 아니다. 

나의 엄마는 자신의 신체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엄마를 “풍채가 있으시다.”라고 사람들에게 묘사하곤 했다. 엄마의 신체를 나조차 비하하고 싶지는 않은, 나 나름대로의 엄마에 대한 예의라고나 할까. 

쉽게 말해 엄마는 뚱뚱하다. 나는 뚱뚱한 엄마가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보드라운 살갗과 말랑거리는 뱃살에 기댈 때면 바깥에서 받아온 상처와 아픔을 한꺼번에 씻어놓는 마냥 포근하고 편안했다. 작은 키에 풍만한 가슴, 축 늘어진 뱃살은 엄마에게는 콤플렉스였을지 몰라도 내게는 쉼이자 안식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았다. 

‘엄마는 왜 저렇게 자기애가 없지?’

그런 엄마가 싫었다. 사랑하는 엄마인데 엄마 자신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 아이러니. 

그런데 그 아이러니는 내가 답습하고 있다. 

육신을 바라보는 관점은 엄마의 관점이 오롯이 내게도 전달되어 몸떵어리는 오로지 덜어내야 할 지방덩어리로만 보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고 나니 참 슬프다. 그 옛날 미의 상징인 비너스는 아랫배도 볼록하고, 허벅지도 튼실하고, 팔뚝도 두툼하던데. 

왜 지금은 마르면 마를수록, 날씬하면 날씬할수록 더 예뻐보인다는 생각이 오늘날의 사람들을 다이어트에 집착하게 옥죄는가. 뚱뚱하면 게으르다는 생각, 날씬한 여자는 보호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주입되었기에 이다지도 현대인들을 괴롭힌단 말인가.

오늘도 무심결에 길을 걷다 한 걸음마다 마주치는 광고들을 보며 ‘와, 예쁘다’는 생각이  나의 무의식에 차곡차곡 자리 잡는다. 안경점을 지나 갈 때도, 올리브* 앞을 지나갈 때도, 심지어는 외모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부동산, 핸드폰 가게 앞을 지나면서도! 왜 광고판에는 키 크고 늘씬한 여배우만 있는가 말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너는 안 예뻐, 예뻐지고 싶으면 나처럼 날씬해져봐 라고 내게 말을 거는 것만 같다. 평범한 몸조차도 평범하다고 인식되어지지 않게끔 미디어는 계속해서 뚱뚱하면 안 예쁘니 살을 빼라고 부추긴다. 진정 날씬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몸인가!     

이런 나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를 만났다.

제목도 매력적인 <I feel pretty>. 제목만 보면 여느 외국의 로맨틱 코미디처럼 금발의 미녀가 등장할 법한 영화이건만 포스터부터가 의아하다. 선글라스 끼고 어깨 펴고 당차게 걷는 여주인공의 모습은 얼핏 보면 악마가 프라다를 입은 포스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어랏? 풍성한 가슴은 글래머러스하다고 쳐도, 저 뱃살과 저 힙 라인은 무엇? 완전 현실 몸매가 아닌가.

알고 보니 이 영화 나의 고민과 바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통통한 몸매에서 오는 자신감 결여와 한 순간에 마법처럼 쭉쭉 빵빵 늘씬한 미녀가 되고 싶은 작은 소망을 말이다. 

스토리는 대강 이렇다. 통통한 자신의 몸매가 불만인 여주인공은 우연한 사고로 자신의 몸이 날씬하게 보이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남이 볼 땐 하나 변한 것 없는 몸이지만 자신감이 붙은 그녀는 점차 매력적인 여자로 변해가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에 감정이입도 되었다가, 그녀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입장도 되면서 “아름다움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할 때 비로소 나온다”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필요한건 다이어트가 아닌 “자기애 충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받아온 인식을 변화하기란 참 쉽지가 않다. 사람이 그렇게 변하기가 쉬웠다면 심리학이라는 심오한 학문은 생기지도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슬프게도 오늘도 난 다이어트를 결심한다. 

이 눔의 저주받은 몸뚱아리를 한탄하며 왜 맛있는 음식은 모두 고칼로리냐며 절망하면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녁에는 로제떡볶이를 시켜먹어야겠다.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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