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로기 치매와 함께 걷는 길 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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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제1화 비밀번호가 뭐지?
제2화 너 때문에 치매 걸린 거지
제3화 광야에서
제4화 너는 내 운명
제5화 뇌건강학교에서 희망을
제6화 나를 잊지 마세요.
제7화 괜찮아, 잘했어.
제8화 함께 가는 길
에필로그
프롤로그
2017년 7월에 남편이 조발성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다. 그때 나이가 50대 초였다. 병원 진료실에서 의사의 최종진단을 들었을 땐 너무 당황스럽고 무섭기만 했다.
세월은 흘러 그때부터 여러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처음 치매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치매국가책임제라는 말도 들리고 지역마다 치매안심센터도 생겼지만, 막상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면 60세 이상만 이용할 수 있다며 거부당했었다.
물론 초창기의 일이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초로기 치매 환자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더러 보인다.
그때는 젊은 치매 환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별로 없었다. 치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무섭고 불안했던 날들이 계속되었다.
치매 진단을 받고 1년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냥 멍하고 우울한 상태로 지냈던 것 같다. 맨 처음 병원문을 두드렸을 때부터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애써 부정하고, 분노하다가 타협하는 시간을 지나 깊은 우울을 겪었고, 이제야 겨우 한숨 돌리고 있다. 치매를 수용하고 운명처럼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2022년도 가을의 초입에서 초로기 치매 진단을 받은 지 2년이 채 안 된 가족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배우자의 치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50대 초중반의 부부이다. 남편의 치매 진단 후 서울 생활을 접고, 먼 시골을 택한 그분들은 아직 치매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똑똑하고 완벽하던 전문직 남편의 치매 진단은 얼마나 큰 고통일지 상상이 안 된다.
그들이 몇 년 전에 내가 겪었던 과정을 똑같이 반복하는 걸 보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초로기 치매 환자와 가족에게 작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누구나 건강한 삶을 꿈꾸고, 아프더라도 치매만 안 걸리면 좋겠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치매에 걸리는 걸 두려워하고, 암이나 죽음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 같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85세 이후에는 내가 치매 환자가 되든지 가족 중에 치매 환자가 생기든지 둘 중 하나는 피해 갈 수 없는 상황이 된다. 한참 일할 젊은 나이에 질병에 걸린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부정적인 생각만으론 숨이 막혀서 현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치매와 친구가 되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갈 것인지 생각해 본다.
죽어야만 가는 천국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 여기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이곳이 천국이 아닐까. 가족이 치매에 걸렸다고 무너지진 말자고 다짐한다. 다가올 미래가 매우 두렵고, 불안하고, 무섭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옆에 미소 짓는 남편이 있고, 아이들이 있으니 용기를 내어 사랑하며 살리라.
제1화 비밀번호가 뭐지?
남편이 이상한 걸 눈치챈 건 7, 8년 전쯤부터이다. 10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의 똑같은 출근길이 헷갈려 빙빙 돌아가는 게 이상했지만 살던 데서 몇 킬로 떨어진 곳으로 이사한 직후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길을 헤매고 어렵사리 출근하면 업무를 시작하면서 바로 전화가 오곤 했다.
'컴퓨터 비밀번호가 뭐지?'
'업무포털 비밀번호가 뭐였지?'
'네이버 아이디, 비번이 뭐지?'
안절부절못하고 떨리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인의 모든 비밀번호를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전화를 받으면서 당황하긴 했지만, 남자들도 갱년기가 온다더니 그래서 기억력이 조금 떨어졌나 짐작했다. 어려운 출근길,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서 컴퓨터도 못 켜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퇴근 후에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너무나 무기력해 보였다. 원래 단순명쾌하고 밝은 성격인데 이상했다. 성당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었고 다니던 직장에서도 계속하던 일이라 익숙할 텐데 이해가 안 갔다. 우울증일까? 특별히 몸이 아픈 데는 없는데 비밀번호도 자주 잊어버리고, 중요한 서류를 분실하기도 하고, 잦은 실수가 반복되니 뇌에 종양이라도 있나 생각했다. 그러다 괜찮겠지, 하면서 유난히 찬 바람이 스산하던 그해 겨울이 지나갔다.
다음 해가 되자 남편은 더 많이 힘들어했다. 가까운 2차 병원 신경과에 가서 MRI를 찍었다. 의사는 혈관이 깨끗하다면서 아무 이상이 없다고 신경정신과로 의뢰를 했다. 신경정신과에서는 여러 가지 검사를 하면서 우울증 진단을 내렸다. 정신과에서 처방한 약을 먹었지만, 차도가 없었다.
그때 마침, 거리에서 캠페인 활동하면서 알던 선배가 유명한 한의원에 가보라고 소개해줬다,
두어 시간 거리를 달려 아산까지 가서 한의사를 만났는데 맥을 짚어 보더니, 비장이 좋지 않아서 정신이 흐려졌다고 했다. 한약을 먹으면 좋아질 수 있다는 말에 비싼 한약을 몇 재 지어 먹었다.
한약을 먹고 몇 달이 지나도 남편은 여전히 침울했고 기억력이 좋지 않았다. 평생 화를 모르던 사람인데 감정이 격해지기도 하고, 퇴사하고 싶다는 말도 자주 했다. 직장에서 업무 실수가 잦아지면서 상사에게 지적을 받고 경위서를 쓰고 온 날도 있었다. 남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힘들어 보였다. 뭐가 힘든 건지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는 몹시 불안하고 슬퍼 보였다.
무더운 여름이 왔는데도 더위를 느낄 틈 없이 마음은 서늘한 날들이었다. 그때 우연히 어느 종합병원 신경과 교수의 치매 칼럼을 읽게 됐다. 그 글을 읽으면서 혹시 ‘내 남편이 치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쉰 살이 넘은 지 얼마 안 됐기에 그렇게 생각하기엔 너무 젊었지만, 진료의뢰서를 들고 무작정 종합 병원문을 두드렸다.
처음 담당 의사를 만난 날에 남편의 증상을 빼곡히 적어 갔다. 의사는 남편에게 간단한 질문을 했다.
'올해가 몇 년도 인가요? 오늘이 몇 월 며칠인가요? 무슨 요일입니까?'
'사는 곳이 어디인가요? 여기가 어디인가요?'
'100에서 7씩 계속 뺄셈을 하세요.' 등등.
계속되는 의사의 물음에 남편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나이도, 오늘 날짜도, 병원이 있는 동네도 몰랐고, 100에서 7을 뺀 다음에 93에서 7을 빼면 얼마인지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너무 놀랐다. 남편의 흐린 눈동자가 갈 곳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도 같이 흔들렸다.
진료를 끝내자마자 의사는 바로 치매 증상이라고 했다. 물론 더 복잡한 신경인지검사도 하고, MRI 판독도 다시 하고, PET 사진도 찍고 나서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정식 진단을 내렸다. 나쁜 단백질인 ‘베타 아밀로이드’가 가득 찬 울긋불긋한 뇌 사진을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 정도로 진행된 건 20여 년 전부터 뇌에 베타 아밀로이드가 쌓이기 시작한 거라고 했다.
그때까지 남편이 치매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가족력도 없었다. 삶에서 이런 절망스러운 순간을 얼마나 만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슬픔이 우리를 덮치는 것 같았다. 무너진 터널 안에서 갈 길을 못 찾는 영화 속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영화 '터널'의 주인공 하정우는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고 구출됐지만, 그때의 우리는 갈 길을 모르고 있었다. 해피엔딩은 우리에겐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진단을 받은 후에 오히려 담담해 보이는 남편을 보니 직장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갔다. 곧바로 사표를 던지고 나서는 무척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그동안 기억력 저하, 성격 및 감정의 변화, 방향감각 상실, 계산능력 저하 등으로 업무수행을 제대로 못 했던 일들이 모두 설명되었다. 직장에서는 병가를 권하기도 했지만 결국 사표를 제출했다. 새로운 직원에게 인수인계해주고 가라고 했지만, 업무 내용이나 절차를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해서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인수인계를 해 줄 수 있으면 내가 다니지 왜 그만두겠어?'
치매 진단 앞에서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다. 조발성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은 이 남자는 그동안의 든든한 남편이자, 자상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사라져버리고 그냥 초등학생 고학년쯤의 어린아이 같았다.
모든 고통은 내 몫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험한 세상의 다리가 돼 주겠다.'라던 남편의 약속은 이제 나의 십자가로 돌아왔다.
정상적으로 일상생활을 잘 유지하던 사람이 어느 날 기억력 저하증세가 자주 생기고 적절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거나 성격 변화가 보이면 나이와 상관없이 한 번쯤 치매를 의심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물론 대부분은 가벼운 건망증이거나, 우울, 노화 등으로 그럴 수 있지만, 혹시 치매일 수도 있다. 건망증은 나중에 다시 생각이 나지만 기억장애는 다시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남편의 기억력 저하나, 길을 못 찾는 등의 증상이 있었을 때 내가 알아채지 못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때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기에 진단받기까지 몇 년 동안 혼자 힘들어했을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제2화. 너 때문에 치매 걸린 거지.
남편이 치매라는 소식은 메신저를 통해 멀리멀리 날아갔다. 친구들과 선후배, 가까운 친지들,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에게 치매 걸린 남편은 믿을 수 없는 악몽이 되어 떠돌아다녔다.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해서 스트레스받은 탓에 치매 걸렸다는 어머니의 말씀은 가슴을 파고들어 깊고 깊은 상흔으로 남았다. 너도나도 말을 보탰다. 동생은 남편에게 좋은 걸 못 해 준다고 화를 내고, 친구들은 착했던 남편이 그동안 잘했으니까 이제부터 내가 잘하면 된다고 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서러워서 울고 또 울어도 마음은 계속 아팠다.
외국에 나가 공부 중이던 큰아이 아래로 대학생 둘, 고등학생 하나까지 부양할 자식은 많기도 했다. 추간판수핵탈출증으로 잠시 쉬던 나까지 온통 백수인 우리 집에 희망의 불씨를 어떻게 살려야 할지 막막했다. 치매에 대해선 전혀 알지도 못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잡혔다. 별빛조차 없는 새까만 밤이었다. 새벽은 과연 올지 믿을 수 없는 나날이었다.
화가 났다. 마음이 아팠고, 몸도 같이 아팠다. 나도 우울했고, 남편도 우울했다. 서로가 말을 잃어가고 있었다. 잠을 잤다. 자고 또 잤다. 혼란스럽고 의기소침해진 우리는 회피라는 방어기제와 금방 친해졌다. 얼마 전 작은 집을 장만했을 때의 대출금은 눈덩이처럼 늘어났고, 생활비는 더 줄일 데도 없었다. 자존감은 심연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찾아볼 수 없었다. 남편도 불쌍했고, 나도 그랬다.
진료를 받으러 신경과 접수대 앞에 서성이면서 광역치매센터의 교육안내문을 보았다. 곧바로 ‘휴식공간’이라는 가족 교육에 참여했다. 교육을 통해 치매에 대해서 배우고, 여러 치매 가족들을 만났다. 시부모님, 친정 부모님, 남편, 아내가 치매인 분들이 참여했다.
교육 시간에 강의를 들으면서 울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또 울었다. 교육이 끝난 후에 광역치매센터의 가족 자조 모임 물망초의 회원이 되었다. 그곳에서 치매 남편과 함께 교육을 들으러 오신 같은 동네 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나보다 몇 년 먼저 남편을 간호하고 계셨던 그 부부를 보면서 외롭고 힘든 우리의 미래를 미리 볼 수 있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치매와 함께 한지 몇 해가 지나니 가까웠던 사람들이 점점 연락이 뜸해지고, 남편을 불편하게 여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괜스레 서운해지고 서글펐다. 세상은 치매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정말 나 때문인 걸까?
나를 만나서 이 사람이 아픈 걸까?
시어머니의 '너 때문에 치매에 걸렸다.'라는 말씀은 뾰족한 가시가 되어 내 목구멍에 걸렸다.
아직 대소변을 못 가리는 것도 아니고, 인지기능 저하로 경제활동을 못 하는 것뿐인데도 사회적 고립감은 무척 컸다. 남편과 나는 황무지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말라비틀어진 쓸모없는 나뭇가지 같았다. 그와 함께 손잡고 씩씩하게 일어서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치매는 그렇게 뇌를 갉아 먹는 아메바, 네글레리아 파울러리처럼 다가왔다.
제3화. 광야에서
치매 진단을 받고 무력감에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초기에는 참 쓸쓸했다. 친정 부모님의 묘소에 가서 하염없이 앉아 있기도 하고 성령 기도회에 가서 소리치며 울어도 봤다. 왜 내게 이런 불행이 들이닥친 것일까? 누구보다 착하다는 말을 듣고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 온 남편은 왜 치매에 걸린 걸까? 해답을 얻고 싶어서 몸부림치다가 혼절하기도 했다.
남편이 아픈 게 그때는 왜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오랜 친구의 선물로 둘이 훌쩍 여행을 떠났을 때도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멋진 풍광과 아름다운 꽃들로 둘러싸인 북해도에서도 남편의 불안한 눈빛은 나만을 향하고 있었다.
며칠간의 여행을 끝내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는데 남편은 그곳이 어딘지도 알지 못했다. 진단받은 지 6개월이 안 된 시점이었는데도 남편의 기억력은 뚝 떨어져 있었다.
우리의 전화벨이 울리지 않은 지는 한참이 되었다. 남편의 친구는 몇 명 있었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연락을 주는 사람은 암 수술을 받고 요양 중인 한 명뿐이다. 원 가족은 연락이 거의 없었다. 남편과 나의 움츠러든 마음은 점점 고립되고 있었다. 휴대전화 연락처가 하나둘씩 줄어들었다. 가끔 몇 안 남은 지인들을 남편과 같이 만나는 게 사회활동의 다였다. 비는 세차게 내리는데 우산도 없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걷는 것 같았다. 겨울은 오지도 않았는데 몹시도 춥고 서러웠다.
이유 없이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괜스레 불편하고 섭섭한 마음이 자주 들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텔레비전을 켜면 남편은 망부석처럼 몇 시간씩 앉아 있고, 잠을 자면 12시간도 더 잤다.
자다가 아주 가끔 실수도 했고, 화장실 문을 못 찾아서 방을 서성거렸다. 혼자 밖에 나가서 길을 잃기도 했다. 무기력한 남편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겁이 났다. 결국 짜증을 못 이겨 병원에 갔다. 화병이라는 말을 들었다. 다른 곳에도 갔다. 공황장애라고 했다. 약을 타다 놓으니 안심이 됐다.
'그래 약을 먹고 정신을 차리자.'
'이겨내 보자.'
'떨어진 자존감을 찾자.'
언젠가 만났던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났다.
'이제부터 고통의 시작이야. 사랑한다면 말이야.'
'그래, 이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며 행복했듯이 앞으로의 삶도 행복하게 살자.'
'고통도 기꺼이 나눠 갖자.'
'행복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거잖아.'
아직 인생의 겨울은 오지 않았기에 우리 부부의 삶은 그때부터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시계는 늦은 오후를 가리켰다. 이제 곧 해가 지겠지만 계절은 아직 가을이다. 황금 들판의 고개 숙인 벼들처럼 아픔 앞에서 겸손하게 용기 내어 살아가자고 다짐했다.
제4화. 너는 내 운명
남편이 치매에 걸리고부터는 스쳐 가는 바람결에도 아팠던 것 같다. 어쩌면 그전에도 힘든 시간은 제법 있었다. 24년 전, 전남편과 이혼하고, 아이 셋과 지하 단칸방에서 살 때였다. 그때 낯선 아저씨를 유난히 따르던 셋째의 고사리손을 놓지 못했는지 무작정 직진하는 그의 모습에 얼마 후 재혼했다. 주변의 반대가 엄청 심했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사랑하고, 막내도 낳고 성당에서 혼인성사도 받았다.
이혼은 나의 선택이었을 뿐이라고 큰소리쳤지만, 내면의 상처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 아픔들을 하나하나 감싸 준 사람이 남편이다. 그의 사랑은 나의 슬픔과 절망까지 담아낼 정도로 크고 깊었다. 복합 가족으로 함께 아이들을 키우고 살아오면서 가끔은 갈등도 있었지만, 궂은날보다 좋은 날이 더 많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과 이혼녀라는 꼬리표를 상관 안 하고 남편은 기꺼이 내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는 지금까지 ‘안돼’라는 말을 거의 한 적이 없을 만큼 본인보다는 나를 먼저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살아왔다. 큰 나무 같은 그의 사랑 덕분에 나의 상처도 차츰 치유되었고, 아이들도 잘 자라게 되었다. 모두가 남편 덕분이다. 치매에 걸려 대여섯 살 정도의 아이 같을 때도 있지만 남편의 눈동자에는 지금도 사랑이 가득하다. 누가 봐도 동안이고 피부도 하얗고 윤이 난다. 어떨 땐 귀여운 막내아들 같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그를 만난 건 나의 행운이고, 우리 가정의 평화는 잔잔한 파도처럼 넘실대고 있다. 어떤 질병이라도 이겨내고, 어떤 편견과도 당당히 싸우면서 사랑하고, 또 사랑하리라. 진정한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니까. 너는 내 운명이니까.
몇 해 전, 찬 바람이 불어오던 겨울의 초입에서 모 문화재단에서 기획한 '5064 생애전환예술교육'에 남편과 함께 참여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행운'과 '평화'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교육 시간에 시인이던 동창 친구도 만나고, 시민 활동가도 만나면서 조금씩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아픈 사람도, 건강한 사람에게도 생애 전환은 중요한 일이었다.
남편은 그림자처럼 묵묵히 따라다녔다. 흥미도 없는 강의 시간이 지루할 텐데도 싫은 내색도 없이 매주 거르지 않고 참석하고, 내 손을 꼭 잡았다.
교육이 끝난 후에 문화예술 후속 프로그램으로 우리는 글쓰기를 신청했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지원금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작은 책으로 만들었다. 물론 남편은 한 줄도 직접 쓰지 못했다. 나는 그와 만나서부터 그때까지의 이야기를 적었다. 남편에게는 가족과 친구들이 그를 기억하며 보내는 따뜻한 편지글을 엮어서 선물했다. 소박한 책자 한 권은 '행운'으로 또 한 권은 '평화'로 기록되었다.
우리는 함께 길을 걸으며, 그는 나의 동반자가 되고, 나는 그의 하나뿐인 친구가 되었다.
'당신을 만난 건 나의 행운이고, 우리에게는 참 평화가 있어요.'
내 영혼은 그제야 조금 숨을 쉬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던 남편은 내가 밥을 안 해도 금방 뭐 먹어서 배 안 고프다고 하곤 했다. 내가 바빠 가끔 청소를 안 해도 본인이 하면 된다고 했다. 아이들과 같이 노는 걸 즐거워하고, 두 손 모아 묵주기도를 드리고, 함께 성당에 갔다. 유난히 목소리가 큰 막내딸이 어릴 적에 같이 성가를 부르던 남편이 생각난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평일 미사라 신자 수가 적은 성당 안에 부녀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었다. 머리숱이 없어도 당당했고, 키가 작아도 마음속은 바다보다 깊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서 가끔은 답답하다는 남편을 바라보며 내 마음은 몹시도 울렁거렸다.
힘들고 지칠 때면 책꽂이에서 행운과 평화로 기록된 작은 책을 다시 찾아본다.
'여보, 나를 기억해 주세요. 그러나 못하셔도 좋아요.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있으니까요. 나와 함께 가요. 프란치스코! 내가 기억할게요. 이토록 멋진 당신! 내가 함께할게요.'
제5화. ‘뇌건강학교’에서 희망을
2018년 11월에 광역치매센터 부설로 운영되는 '두뇌톡톡 뇌건강학교'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뭐가 그리 바쁜 건지 개소식을 놓쳤다. 전국 최초로 설립된 초로기 치매 환자를 위한 기관이었다. 뇌건강학교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에 치매 환자 쉼터가 시작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초로기 치매란 65세 이전에 발병한 치매를 말한다. 주로 노인성 질환인 치매 환자 중에 10% 정도는 65세 이전에 발생하는데 남편도 그중 한 명인 것이다. 초로기라는 말과 조발성이라는 말이 일찍 발병된 젊은 치매에 같이 쓰인다.
뇌건강학교에서 담당 선생님과 초기상담을 하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쉼터에 갈 수 있었다. 집에서부터 차로 1시간여를 달려가야 도착하는 곳이었지만 푸르른 잔디마당에 붉은 벽돌로 단아하게 지어진 학교 앞에 서면 늘 가슴이 설렜다. 우리는 쉼터가 문을 열면서부터 지금까지 몇 년 동안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남편이 학교에 있는 동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학교 마당기슭에 있는 오래된 감나무를 바라보며 그네 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면 참 평화롭고 행복했다. 지금 여기가 천국이었다. 몇 시간만이라도 혼자서 쉴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다. 치매 남편과 같이 걸어가는 길은 어떨 땐 한없이 쓸쓸하고 두려운 여정이다. 그곳에서 잠시만이라도 여유를 찾을 수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된다.
남편은 막상 학교에 가도 초반에는 반응을 잘 보이지 않았다. 무감동도 치매의 한 증상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엔 표정이 굳어 있었고, 가는 걸 귀찮아하곤 했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을 보내고 나니 지금은 쉼터에 잘 적응한 듯하다. 동료들과 얘기도 하고, 크게 웃기도 하면서 얼굴이 무척 밝아졌다.
특별한 사회적 관계망이 없는 상황에서 뇌건강학교의 쉼터 프로그램은 중등도로 가는 길 앞에서의 마지막 보루처럼 이 사람을 지켜 주고 있다. 최근엔 몇 개월 동안 안심 돌봄 상담가 선생님이 뇌건강학교의 등하교에 함께 해 주셨다. 사회적일자리로 봉사해주셨는데 덕분에 소진된 에너지를 충전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뇌건강학교에서는 초로기 경증치매에 걸린 분들이 모여서 단어를 연결하고, 노래를 부르고, 쿠키를 만들고, 구슬 퍼즐 맞추기 등을 한다. 같이 손잡고 학교 옆에 있는 승학산을 오르고 꽃을 심는다. 그곳에서는 치매에 걸려도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인지기능이 조금 떨어지고, 판단력이 부족하지만, 그냥 사람과 사람으로 관계 맺기가 가능하다. 알츠하이머인 사람도, 파킨슨으로 인한 치매도, 혈관성 치매인 사람도 함께 웃고, 공부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즐겁게 지내고 있다.
치매에 걸렸더라도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할 소중한 사람들인데 이 세상의 벽은 너무 높고 차갑다. 그나마 아침에 일어나서 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하다.
학교에 다니기 전에 집 근처 치매안심센터의 인지 강화프로그램에 가본 적이 있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나이가 70대에서 80대였다. 50대 중반인 남편은 그때까지 인지기능이 많이 떨어진 상태는 아니었기에 부모님 나이대의 분들과 함께 하는 걸 무척 불편해했다. 어떤 어르신은 젊은데 왜 왔냐고 대놓고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물론 그분도 치매 환자이기에 별생각 없이 말씀하셨지만, 남편은 무척 기분 나빠했다. 집 근처에 있는 치매안심센터는 거리는 가까웠지만 다른 벽이 너무 높았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온종일 자거나 무기력하게 지내니까 인지기능이 급격히 나빠질 수 있으니 초조했다. 주간보호센터에도 가 봤지만, 너무 고령인 분들이 많으시고, 중등도인 환자들 위주라서 남편에게 맞는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 쉼터에 다니던 자매님이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알코올성 치매를 앓고 계셨는데 그 소식이 너무 늦게 전해져서 슬픔을 함께하지 못했다. 오늘 아침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이지만 그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마음 아파했다. 돌아가신 걸 알게 되자 남편은 장례식장에 가야 한다며 겉옷부터 찾았지만, 발인도 이미 끝나버려 가지 못했다.
함께 배우고, 손뼉 치고 노래하고, 학교 마당에 노란 개나리, 채송화도 같이 심었었는데 60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신 그분의 모습이 내 일처럼 쓸쓸하게 다가왔다.
남편은 지난봄 벚꽃 나무 아래서 여럿이 찍은 사진 속에서 돌아가신 자매님을 찾아내며 오래 기억했다.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과의 기억은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장기요양보험공단에서 실시하는 치매 전문교육에서 어떤 강사가 말하길 ‘시·장·사람’ 순으로 기억이 없어진다고 했다. 치매에 걸리면 맨 처음에는 시간개념이 사라지고, 그다음에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사람을 잊어버린다고 했다.
65세 이후에 발병하는 분들은 현재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과거의 기억은 대부분 오래 가지고 계신다고 한다. 그런데 초로기 치매인 남편은 과거의 기억도 대부분 알지 못한다. 나를 만나서 사랑하고, 함께 살아온 시간 속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도 잊고, 결혼식의 행복했던 기억도, 아이를 낳았던 기쁨의 순간도 기억에서 없어졌다. 다니던 직장이 어디였는지도 정확히 모르고, 나이도 잊고, 생일도 헷갈린다. 밖에 나가면 몇 미터 앞에서도 집으로 가는 방향을 못 찾는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 오는 것도 이제는 하지 못한다.
가끔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물으면 50대 초반에서 60대 중반까지 그때마다 다르게 대답한다. 올해가 몇 년인지도, 계절이 바뀌는 것도 잘 모른다. 한낮인데도 밤인 줄 알고, 주소도 모르고 본인의 전화번호도 헷갈린다. 아직 주민등록번호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이 감사하다.
처음 진단받았을 때는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의 일상생활이 가능했다면 지금은 점점 안 좋아져서 대여섯 살 정도의 인지기능에도 못 미치는 것 같다. 지금은 집 안에서 화장실이 어딘지를 알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가끔 마음이 내려앉는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은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마주 잡을 수 있고, 웃을 수 있으니까 감사하다. 오늘만 살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지난달 병원에서 검사한 신경인지검사에서는 MMSE 점수가 12점이었다. 처음 진단받았을 때는 23점이었다. 임상치매등급 척도 CDR은 0.5로 시작해서 현재는 2이다. 진단받고 나서 몇 년 간 잘 유지되던 상태가 최근엔 무척 안 좋아져서 산정특례 등록을 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직접 느끼기에는 점수보다도 더 안 좋아진 것 같다. 엊그제는 칫솔에다가 비누를 문지르면서 치약이라고 했다. 목욕도 스스로 하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나가면 몇 미터만 가도 집을 찾지 못한다. 그래도 아직 괜찮다고 생각한다. 걸을 수 있고, 수저를 들고 음식을 삼킬 수 있으니 오늘도 좋은 날이다.
뇌건강학교에서 운영하는 쉼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매주 수요일 오전에는 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쉼터 이용자들과 번갈아 청소도 하고, 카페에서 음료도 제조하면서 사회성이 유지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매달 셋째 주 금요일에는 '가치 함께 시네마'라는 프로그램이 운영되는데 인천 동구 배다리에 있는 미림극장에서 고전영화나 치매에 대한 영화를 무료로 상영한다. 극장에서 보조 인력으로 봉사하고 있다. 극장에서 대여섯 시간 머물며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소정의 실비를 받으면서 남편의 자존감이 향상됨을 느낀다.
뇌건강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화요일에 '가치 함께 사진관'과 나눔장터도 운영하면서 지역주민들에게 장수 사진을 찍어 드리고 있다. 사진사였던 동료의 활약이 제일 크지만, 봉사하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모습이 무척 즐거워 보인다.
여기서 운영하는 여러 프로그램이 남편을 비롯한 초로기 치매 환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한 초로기 치매를 위한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겐 정말 기쁜 소식이다. 너무나 필요한 곳이고, 수고해 주시는 모든 분께 정말 고맙다. 더 많은 뇌건강학교가 생겨서 집 가까운 곳에서 이용할 수 있다면 병의 급격한 진행도 늦출 수 있고, 사회경제적 비용도 줄일 수 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다. 뇌건강학교와 함께 희망을 노래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고 행복하다.
제6화. 나를 잊지 마세요.
광역치매센터의 치매 가족 자조 모임 물망초 회원 한 분, 한 분은 모두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물망초의 꽃말은 기억을 잃어버리는 치매 가족을 돌보면서 느끼는 슬픈 울림이다. 가족들은 서로의 고통을 공감하고 함께 이겨내기 위해 모였다.
치매 환자를 돌보다 보면 사회적 고립감을 느끼고 우울감에 빠지기 쉬운데 물망초 회원들과의 정기적인 교류는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먼저 길을 가시는 선배들에게서 병간호의 꿀조언을 얻고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다. 물망초 회원들과 함께했기에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길을 갈 수 있었다.
특별히 올해에는 회원들과 함께 치매 가족으로서 경험한 것들을 '치매 때문에 치매 덕분에'라는 대담집을 발간했다. 각기 다른 주제로 몇 개월에 걸쳐 대담하면서 회원들의 깊은 마음속 이야기들을 통해 나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선배 회원들의 가슴 속 깊은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도 하면서 서로를 통해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 특히 대담을 이끌어주신 작가님은 치매 아버지와 함께하신 경험을 '새파란 돌봄'이라는 책으로 내신 분이다. 젊은 작가님을 통해 많은 걸 배우고 있다. 각자의 아픔을 꺼내는 건 용기가 필요하지만, 서로에게 삶의 등대가 되어주는 귀한 일인 것 같다. 그렇게 토닥토닥하다 보니 시리던 어깨가 따스해짐을 느낀다.
너무 부유하면 가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똑똑하면 그보다 못한 사람들을 바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너무 영적인 사람들은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한다.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처음 알츠하이머병과 마주했을 때 느꼈던 혼란스럽고 두려운 마음은 치매 가족이 아니면 알기 어려울 것이다.
운명처럼 치매를 만나 가족이 되었고 물망초 회원분들과 손잡고 걸어가는 이 길은 험난하지만, 혼자가 아니기에 외롭지만은 않다.
광역치매센터에서는 주돌봄자를 위한 치매환자가족지원 통합프로그램 '휴(休:쉬다), 식(識:알다), 공(共:함께하다), 간(看:돌보다)'을 운영하고 있다. 가족이 치매에 걸리면 환자 본인도 힘들겠지만, 치매 가족이 되면서 제일 먼저 '휴식공간'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 그 후 곧바로 물망초 회원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
처음 치매 진단을 받았을 때만 해도 초로기 치매 환자들의 예후가 안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발병 후 1, 2년 안에 중등도로 진행되어 평균수명이 짧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절망감이 컸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인지기능이 떨어지긴 했지만, 일상생활을 잘 유지하고 있다. 물론 혼자서는 생활하기 어렵다. 밥을 차려 먹지도 못하고, 시간 맞춰 약을 챙기지도 못한다. 일상생활에서, 많은 도움이 필요한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내가 옆에서 돌볼 수 있으니 참 다행이라고 위안한다. 남편이 나를 기억하는 날까지, 아니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다 해도 내가 기억하면 되니까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찾아가리라 다짐한다.
나를 잊지 마세요.
남편이 나를 잊을지라도 나는 그를 잊지 않겠다. 사랑한다면 절대 잊을 수 없으니까.
제7화. 함께 가는 길
2021년부터 뇌건강학교 쉼터 보호자들을 중심으로 초로기 치매 환자 가족 자조 모임이 시작되었다. 초로기 가족들이기에 연령대는 40대에서 65세로 비교적 젊은 분들이다. 초로기 가족 자조 모임은 '로즈마리'라는 예쁜 이름을 지었다.
로즈마리의 특유하고 신선한 향이 뇌의 기능을 활성화해주니까 모임을 통해 힐링하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갖기 위한 이름이다.
지난여름에는 회원들과 부부 동반으로 강화도에 다녀왔다. 광성보와 전등사를 둘러보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유적지를 산책하며 그간의 근황을 나누고 역사탐방의 시간을 가졌다. 로즈마리 회원들과 만난 지는 얼마 안됐지만 같은 아픔을 가진 가족들이기에 서로 공감하고, 경험을 나눌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다.
치매와 함께 가는 길은 혼자 가기엔 고통이 너무 크고 불안하다. 치매 바로 알기 등을 통한 인식개선이나 치매 환자와 가족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 경증치매일 경우에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은 할 수 있는데 일주일에 몇 시간이라도 일할 곳이 있기를 희망해 본다.
시흥시에서는 초로기 치매 환자를 위한 지역공동체 일자리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주 20~30시간 이내에 치매 영화상영관 '알츠 시네마'에서 업무 지원을 하면서 최저시급을 보장받고 있다. 치매 환자의 일자리는 의료비 부담과 경제적 어려움을 덜 수 있고, 사회적 비용이 늘어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 시에서도 경증치매 환자를 위한 공동체 일자리가 생기길 기다려본다.
남편이 이 정도 상태를 오래 유지하고 중등도로 가는 길을 늦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지막엔 나도 못 알아보고 기저귀를 사용하게 되는 게 정해진 순서겠지만 아직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 오늘 아침처럼 웃으며 인사하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기차를 타고 단풍을 함께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치매 진단을 받고 처음에 느꼈던 절망과 괴로움은 이제 많이 내려놨다. 처음부터 슬퍼하지만 말고 힘차게 일어섰다면 좋았겠지만 모든 건 과정이 필요하니까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이 가장 젊고, 가장 멋진 날이니까.
요즘은 돌봄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다. 로즈마리회원들을 비롯한 주변의 관계망에서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고민이 된다. 일대일 돌봄은 부담이 너무 커서 스트레스도 많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따르며, 사회성 향상도 쉽지 않다. 꼭 치매가 아니더라도 몇 명이 근처에 살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느슨하고 게으른 공동체를 생각해 본다.
주간보호센터를 가기엔 너무 증상이 경하고, 요양원에 가는 건 너무 슬픈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살아가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인 경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면 좋겠다. 지난번에 방문했던 시골에 살고 계신 초로기 치매 가족분은 치유농업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NGO활동을 오래 하셨던 분이라 금방이라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감이 크다. 앞으로 초로기 치매 환자를 위한 일자리나, 뇌건강학교 같이 매일 갈 수 있는 교육시설이 근처에 더 많이 생겨나길 기다려본다. 끝나지 않는 길을 가는 게 인생이지만 서로 손잡고 갈 수 있기에 더는 무섭거나 불안하지만은 않다.
제8화. 괜찮아, 잘했어.
아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사춘기라 잠시 속을 끓였었다. 어느 날 책상 위에서 메모를 본 적이 있었는데 엄마한테 듣고 싶은 말이 '괜찮아, 잘했어.'라고 적혀 있었다. 일찍 결혼했고, 미성숙한 엄마였기에,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잘 몰랐었다. 성격이 온순하고 내향적인 면이 많은 아이였는데 성향을 무시하고 내가 옳다고만 생각했었다. 그 메모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칭찬에 인색하고 비교하고, 비난만 했던 폭력적인 엄마였다는 걸. 지금도 가끔 그때 일을 아프게 돌이켜 본다. 지금 내 상황에서 내가 듣고 싶은 말도 똑같이 괜찮아, 잘하고 있다라는 말이다.
그동안 왜 그렇게 힘들어했을까? 주변에서 나를 비난하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거에 왜 휘둘렸을까? 인정받고 싶은 욕구, 잘하고 있다는 칭찬이 필요했던 낮은 자존감이 문제였던 걸까?
이제는 주변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여기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먼저다. 남편은 내 곁에 오신 예수와도 같다. 가장 가까운 나의 이웃이며, 제일 먼저 사랑하고 돌봐야 하는 나의 신랑이며, 친구이다.
사랑에 목말랐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착한 콤플렉스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남편이 치매에 걸려서 아내인 내가 돌보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칭찬하는 말들을 듣고 싶었나 보다. 불행이 나만을 피해 가라는 법도 없는데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닫게 되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자. 가슴을 가만히 감싸고 스스로 괜찮아, 잘했어라고 말해 본다. 존중과 인정, 배려받기를 원하기보다 내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하면 된다.
내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고, 남편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지금은 안다.
남편에게 치매라는 질병이 갑자기 찾아왔지만, 괜찮다. 내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돌볼 수 있으니까. 남편이 나를 못 알아보는 날이 오더라도 괜찮다. 내가 기억하면 되니까. 남편에게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괜찮다. 함께 이겨낼 수 있으니까.
'괜찮아, 잘했어.'
'행복은 내가 선택하는 거니까 우리는 계속 멋진 날들을 만나게 될 거야.'
나의 사랑은 고독하고 외롭고 긴 여행길이다. 나와의 싸움, 세상과의 싸움일 수도 있다.
치매 당사자나 가족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긴 여정이다. 누구에게도 쉽게 공감받지 못하는 삶이다. 그렇지만 내가 쉬지 않고 가야 할 나만의 길이다. 끝나지 않는 길에서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에필로그
에세이를 쓰면서 또 다른 치유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동안 남편의 치매를 완벽하게 수용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숨기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짧은 글을 마치면서 고마운 분들을 기억한다. 주변의 지인들이 남편의 치매 발병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와 주고, 내 일처럼 마음 아파해주셨다. 잊지 않고 밥을 사주고,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삶의 지혜를 주신 분들이 계시다.
힘들 때마다 위로가 돼 준 오랜 친구들이 있고, 말없이 지켜봐 주시고, 직접 도움을 주신 분들도 계신다. 그분들께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누구보다 애끓는 마음으로 깊은 슬픔을 느끼셨을 시어머니께도 위로를 드리고 싶다.
치매에 걸렸지만, 강아지와도 즐겁게 인사하고 행복해하는 남편의 천진한 미소가 고맙다. 착한 치매라고 할 만큼 큰 성격 변화를 보이지 않고, 순한 아이처럼 내 곁에 있어 줘서 참 좋다. 함께 밥을 먹고, 따듯한 손을 잡고 동행할 수 있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부족한 부모를 늘 응원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랑하는 아이들 덕분에 자신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인천광역치매센터와 치매안심센터, 두뇌톡톡 뇌건강학교에도 감사드린다. 치매를 극복해 가는 길에서 너무나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치매 가족 자조 모임 물망초와 즈마리의 선후배 회원분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아름다운 분들과 함께라서 절대 외롭지 않고, 두렵지 않을 수 있다.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치매 가족들, 우리 함께 가요.
남편 프란치스코! 그가 평화의 사도로 내게 와서 사랑했고, 나의 아픔이 치유됐다. 그를 통해 치매라는 다른 세상을 탐험할 수 있었다.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 고통을 조금 겪었지만, 더 큰 세상을 알게 되었다. 고맙고 또 고맙고,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이 세상 마지막까지 당신 곁에서 끝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천상에서 다시 만나도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여기에서 불행보다는 행복을 선택할 것이다. 사랑은 아무런 편견 없이, 무조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거니까. 치매에 걸렸다고 해서 존중받지 못하고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해선 안 되니까.
치매가 있어도 그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는 자유롭게 이 세상을 여행하는 자연인이다. 그와 함께 내가 걷는다. 그대와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