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같은 사랑에게
매일 밥을 먹고, 잠자고 일어나듯이 ‘사랑’이란 삶을 살아가는 동안 늘 함께 숨 쉬어 왔던 것 같다. 맨 처음 이게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건 중학교 때였다. 학교 근처에 있던 자그마한 문방구 사장님에 대한 마음이 그랬다. ‘폭풍의 언덕’이나 ‘제인 에어’를 읽으면서 막연하게 사랑을 꿈꾸다가 친절하고 잘생긴 오빠에게 마음이 갔었다. 추운 날이면 가게에 딸린 작은 온돌방에서 몸을 녹이다 가곤 했다. 그냥 마음속으로만 시를 쓰고, 혼잣말하면서 아마 이게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설레곤 했다. 그러다 긴 겨울 방학이 끝나고 문방구의 문이 닫힌 채 다시 열리지 않았을 때 내 사랑도 이른 봄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내향적이고 공부 잘하던 모범생 아이였지만 상고에 가서 은행원이 되길 바라는 아버지 뜻대로 입학한 고등학교는 주산, 부기, 타자 수업의 무한 반복이었다.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상실감에 사춘기가 겹쳐서인지 한순간에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반항하는 아이가 되었다. 성적순으로 임시 반장이 됐다가 3년 연속 반장을 하면서 내향성은 안으로 숨고 어느덧 외향적인 아이가 되어 버렸다. 처음엔 속이 꿀렁거리고 두려웠지만, 사춘기의 격정은 모든 걸 감추어 버렸다. 그때 그 아이를 만났다. 못 생기고 웃는 모습이 귀엽던 작은 아이는 한 살 많았지만, 학년은 더 아래였다. 500일을 만나면서 그 아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다. 늘 웃었고 내 편이 되어 주었던 그를 30대 중반에 다시 만난 적이 있다. 예전 기억 속의 그 아이와 현실 속의 그는 너무 달라서 당황했었다. 우리가 사랑을 얘기하기엔 너무 어렸던 걸까?
한 남자가 있었다. 나를 아주 많이 좋아했던 두 살 위 오빠였다. 청재킷이 참 잘 어울리는 그는 착한 남자였다. 세상의 착한 남자는 예쁜 여자에게 잘해주는 법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반듯하고, 나를 정말 좋아해 준 사람이었는데 그때의 나는 나쁜 남자에게 끌리고 있었다. 그 나쁜 남자가 나의 첫 남편이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던 그를 참 좋아했었다. 목소리도 멋있었고, 영화배우 닮은 각진 얼굴도 분위기 있었다. 군 복무 중에 휴가를 나와 군복을 입은 모습도 좋았다. 그를 배웅한다고 고속버스를 타고 군부대 앞까지 바래다줄 때도 설렜었다. 그가 보고 싶다고 무작정 무등산을 찾아간 날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그리 무지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후회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가 그렇게 나의 첫 남자, 첫 남편이 되었고, 지금은 전남편이 되었다. 그와 아이를 낳았고, 함께 울었고, 함께 좌절했었다. 21살에 결혼을 하고 34살에 이혼할 때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사랑했다고 생각했고, 사랑받으리라 믿었던 결혼 생활은 그렇게 힘없이 무너졌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은 생물처럼 변할 수 있다는 걸 그땐 몰랐다. 사랑은 서로가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 존재할 수 있는 것 같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준다던 두 번째 남편의 정성 어린 편지에 나는 다른 사랑을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양쪽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와 아이들은 새로운 운명에 몸을 맡겼다. 처음부터 쉽진 않았다. 복합가정의 여러 어려움을 조금씩 극복하면서 그래도 맘껏 웃을 수 있었다. 덕분에 끼니 걱정을 안 했고, 위로받았고,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착한 남편인 그가 치매와 친구로 지낸 지 벌써 칠 년째다. 경증으로 시작된 증상은 중증을 지나가고 있다. 지금 나는 그를 사랑하는가? 사랑한다.
그와 내가 서로 교감하지 못한다 해도 사랑한다. 그의 모습이 변하고 내가 알던 사람과는 다르더라도 사랑한다. 에로스가 아니라도 괜찮다. 의무만 주어진다고 해도 괜찮다. 그가 사회적으로 하찮아져서 모래알처럼 부서져도 상관없다. 부모 형제에게도 버림받고 친구도 하나 없는 가엾은 그를 더 사랑한다. 그와 함께 한 오늘이 가장 눈부시고 아름다운 날이기에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한다. 그로 인해 삶이 더 고단해지고 힘들어도 괜찮다. 인생은 어차피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이고 끝나지 않는 길이다. 그가 먼저 가도 나는 괜찮다. 그보다 조금만 더 살다가 나도 갔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나에게 사랑이란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걷는 길이며,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은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