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 같다. 아이가 첫발을 뗄 때도 수만 번의 넘어짐이 있지 않은가. 칠 년 전 여러 가지 검사 후에 의사에게서 “초로기 치매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났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느낌이 없었다. 그냥 밥을 먹고, 잠을 자고 TV를 켰다. 남편은 그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처음엔 부정하고 분노하다가 이내 타협하고, 우울과 싸우고 수용할 때까지 거의 3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치매를 만나 어떻게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아이가 자라 사춘기가 됐을 때 당황했던 순간들처럼 치매는 낯설고 어색했다.
시어머니는 나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치매에 걸렸다고 원망했다. 형제들은 남편에게 더 잘하지 못한다고 서운해했다. 남편 친구들은 연락이 점차 줄어들면서 지금은 한 명도 안 남았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저런 말을 보탰지만, 선의도 내겐 상처가 되었다.
직장은 더 다닐 수가 없어서 사표를 냈고 경제적으로는 점점 궁핍해졌다. 겨우 장만한 작은 집 한 칸도 매월 내는 대출이자가 버거울 정도로 어려워졌다.
그는 말이 없어지고 표정도 어두워졌다. 무감동과 무기력이 식탁에 드리워진 차가운 저녁이 반복됐다.
어느 날 치매 가족들의 자조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치매 아카데미에 갔고, 치매 교육을 받았다. 휴머니튜드 간호법을 배웠고, 질병 서사를 가진 사람들의 세미나에서 발표도 했다. 치매 가족들이 모여 대담집도 발간했다. 남편의 치매와 더불어 몇 년 동안의 이야기들을 간단하게 에세이로 엮기도 했다.
남편은 초로기 치매 쉼터에 다녔고, 인터뷰도 하고 뉴스 귀퉁이에 얼굴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흘렀다. 치매랑 친구가 됐고, 치매 증상도 편안해졌다.
간이치매 선별검사 MMSE 23점에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12점으로 많이 떨어졌다. 임상 치매 척도인 CDR은 0.5에서 현재 2점으로 산정 특례 등록을 했다. 그동안 잘 견뎠고 천천히 진행됐다면 지금부터는 마구 달리는 느낌이다. 몇 년 후면 아마도 지금의 일상생활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일 것이다.
남편의 알츠하이머병으로 많은 것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친구도 떠나갔고 부모와 형제도 멀어졌다. 인간으로서 오롯이 존중받지 못하고 배척당했으며 모지리 취급을 받았다. 모든 장애와 질병 중에서도 치매는 제일 낮은 곳에 있었다.
직장을 잃었고 건강도 잃었다. 명예도 사라지고 희망도 사라졌다. 치매로 정말 많은 일상을 잃었다.
그런데도 우린 오늘 웃었다. 못생긴 계란말이를 보고 킁킁거렸고 냉면 한 젓가락을 나눠 먹었다. 오징어를 삶아 저녁밥을 먹었고, 장마가 끝난 후에도 쏟아지는 폭우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밤도 꿈을 꾸고 내일을 더 용감하게 맞으리라.
남편의 치매를 통해 인생을 더 깊이 알게 됐고 나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됐다. 질병과 그에 따른 고통은 나를 더 성장하게 했고 더 나은 인간이 될 기회가 됐다. 아프고 소외되고, 슬픈 그의 뒷모습을 더 짠하게 바라보게 됐고 포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남편의 질병은 나에게 고통을 줬지만, 고통 뒤에 숨은 미소로 겸손하게 나를 이끌고 있다
.
그는 나에게 영감을 주고, 글을 쓰게 하고 살아갈 이유가 되어준다.
작고 소중한 우리 강아지 ‘율무’처럼 사랑스러운 남편은 눈빛으로도 이야길 한다. 배가 고프면 배를 만지고, 배가 불러도 배를 두드린다. 정수기를 옆에 두고도 수돗물을 마시고 목욕을 할 줄 몰라 거울 앞에 벗은 알몸을 우두커니 보고만 있다. 내가 없으면 불안해하다가도 있으면 눈치를 본다. 의미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고 강아지처럼 짖기도 한다. 문을 못 열어서 한참을 서성인다. 시계를 볼 줄도 모르고 지금이 여름인 걸 모른다. 팬티만 입고서 밖에 나가려 하고 온종일 잠만 잘 때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그는 나의 짝이고 나의 친구이다.
우린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이 걷는다.
그가 길을 모르면 내가 한 발자국 앞서면 된다.
앞으로의 미래는 걱정하지 않는다.
오늘 밤이 우리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게 삶이지 않은가.
그대와 걷고 싶다. 인생의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