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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동성 Jun 18. 2021

이찬혁의 과도함을 병이라고 칭해도 되는 걸까

악뮤-작별 인사






떠날 때 창틀에 화분이 비었길래

뒤 뜰의 꽃을 옮겨 담았어요 제라늄 꽃을


떠날 때 책장에 먼지가 쌓였길래

책 하나 속에 꽂아두었어요 짧은 편지를


정든 찻잔도 색이 바랜 벽지도

흔적이 힘들어서 바꾸지 말아요

내 마음에도 같은 것들을 남긴 것처럼


떠날 때 문턱에 나비가 앉았길래

넘지 못하고 바라보았어요


떠날 때 발등에 개미가 올랐길래

걸음 멈추고 나누었어요 작별 인사를


정든 찻잔도 물기 배인 마루도

의미를 알기 전에 바꾸지 말아요

내 마음에도 같은 것들을 남긴 것처럼





최근 독립만세를 보았다. 재재가 좋아서 보기 시작한 거였는데, 재재보다는 이찬혁때문에 끝까지 보았다. 아 내가 이래서 이찬혁 감성을 좋아했었지, 하고 락에 빠져 있느라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악뮤 노래를 열심히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 마음이 그랬다. 이찬혁이 GD병이라며 놀림받고 있는 게. 본인이야 크게 마음 쓰지 않으니 뭐 상관은 없기는 한데.


2013년부터 악뮤를 좋아했다. 2012년에 케이팝스타 나왔으니까 거의 초장부터 좋아했다고 할 수 있겠다. 얼마나 좋아했냐면, 당시엔 PLAY 앨범에 갤럭시가 실리기도 전이었는데 아기 수현 아기 찬혁 시절의 갤럭시 홈비디오를 mp3로 변환해 듣고 다닐 정도로. mp3로 변환했던 홈비디오가 갤럭시뿐만은 아니었다. 먹물 스파게티, 뺏긴 내 밀봉 카스테라, 고백하려해. 전부 데뷔 전의 곡들이다. 언젠가 발매해주겠지 존버를 했는데 온전히 잊은 채 수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앞으로도 요원해 보인다. 여하튼 그만큼 좋아했다는 이야기다. 아직도 툭 치면 악뮤 가사가 입에서 줄줄줄 나온다.


대충 이찬혁과 동년배인 나는 그래서 악뮤와 함께 성장했다. 내가 자라는 동안 악뮤도 자랐다. ‘다르게 보기’ 로 점철된 톡톡 튀는 악뮤 가사는 언제나 나를 즐겁게 했다. PLAY 앨범이 발매됐을 때, 당연히 샀다. 여전히 집에 커다란 포스터가 있다. 사춘기 상, 샀다. 사춘기 하, 물론 샀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나는 락앤롤을 좋아하게 되었고 악뮤에는 다소 소홀해졌다. 찬혁 제대 후 2019년, 항해 앨범이 나왔다. 아무리 잊고 지냈다지만 괴로웠던 학창시절을 견디게 해 준 친구들이므로 발매가 되자마자 들었다. 이전의 앨범들과는 달랐다.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방향으로. 여전한 악뮤 감성이었고, 여전한 악뮤 가사였고, 다만 차분했다. 이전 앨범의 ‘못생긴 척’ 같은 곡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내가 가사 때문에 정말 좋아했던 ‘집에 돌아오는 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춘기 상에서의 ‘주변인’, PLAY에서의 ‘안녕’, ‘얼음들’. 그래서 이번 앨범 컨셉은 차분함인가보다 그랬다. 작별 인사를 듣고 울었다. 산울림적인 무언가를 자극하는 가사 때문에 자꾸 훌쩍댔다. 그리고 잊었다. 도로 락앤롤을… 슈게이징을 들었다.


언젠가부터 인터넷에서 유희열의 스케치북 영상을 필두로 이찬혁의 GD병이 핫해졌다. 예능이라는 틀 아래서 필연적으로 조각나 우습게 포장된 이찬혁의 라이프스타일이 짧은 클립으로 따져 ‘여전한 GD병’, ‘겉멋’ 이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녔다. 꽤 오래 악뮤를 좋아한 마음은 어디 안 가는지라 그 말이 불편했다. 하여 여태껏 피해 다니기만 하다가, 악뮤에 대한 내 오랜 팬심을 다시금 자각하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영상들을 가만히 지켜보게 됐다. 그러나 이찬혁은 변한 게 그다지 없었다. GD병도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언제나의 이찬혁이었고, 오히려 이전에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던 익숙한 이찬혁의 모습이 TV 디스플레이에 맞춰진 이찬혁인 것 같았다. 이찬혁은 지금 스물여섯이다. 이십대 중반을 달리고 있는 친구에게 케이팝스타 열일곱 시절을 여전히 투영하는 건 좀 너무하잖은가.


물론 난 한낱 악뮤의 팬일 뿐이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안다. 허나 찬혁이 어릴 적부터 꽤 예민한 편이었다는 걸 팬들은 알고 있다. 좀 내면으로 파고드는 스타일이다. 어느샌가 감성이 오글거림으로 치부되는 시대, 진지충이라는 말이 젊은층을 장악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의 사는 모습이 좀 과하게 느껴질 수는 있다. 그러나 과함이 없다면 이찬혁에게서 그런 가사는 나올 수 없다. 이찬혁이 이승철에게 써 준 가사를 보라. ‘우리가 잊지 못하는 건 추억이에요/서로가 아니라/우리가 견뎌야 하는 건 이별이에요/서로가 아니라’, 엄청난 통찰력이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그의 과도함은 감성과 궤를 같이하고, 이찬혁은 그저 거기 충실할 뿐이다. ‘군대가기 전에는 안 그러지 않았느냐’ 라기엔, 내 기준 이찬혁은 군대 가기 전에도 과했다. 다만 그게 대중에게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현재 악동뮤지션의 ‘항해’ 에서 나오는 감성은 앞에 언급한 ‘얼음들’, ‘안녕’, ‘주변인’, ‘집에 돌아오는 길’ 에도 늘 있어왔다. 찬혁의 ‘그 감성’ 은 언제나 제 역할을 다했다. 팬이 아닌 이상 타이틀곡 외에는 듣지 않는 세상이므로 아마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덧붙여 이제 라면인건가같은 곡은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이찬혁도 나이를 먹었다. 이해한다. 나도 열일곱~열여덟때 그리던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쓰던 글을 쓰지 못한다. 이십대 초중반은 불과 2~3년이 아주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나도 매한가지로, 2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아주 많은 부분에서 변화했다. 찬혁이라고 그러지 못하리라는 법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물론 200%같은 곡에 찬혁이 그루브를 타는 것이 과하고 웃겨 보이는 것은… 조금은 동의한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다. 찬혁은 언제나 현재의 찬혁에 충실하다. 음악적인 부분에서는 완벽주의다. 하지만 현재의 찬혁은 200%를 쓰던 시절의 찬혁과 많이 다르다. 과도함=감성은 그대로 두고 더 어른이 돼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과 따로 논다. 반면 수현은 역시 성장했지만 타고난 성향 자체가 톡톡 튀는 인간비타민 스타일이라 위화감이 없다. 덧붙여 찬혁이… 수현 보컬에 맞춘 곡을 얼마나 많이 써왔는지 생각을 해보자. 수현 보컬에 의도적으로 맞춘 곡인데 수현에게서 튀면 안 되지. 그러나 찬혁에게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고…


단지 찬혁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성장하고 어른이 되고 있다고 해서, 그 어른되는 과정을 일종의 겉멋 병으로 놀릴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 마음이 그렇다. 대중은 스물여섯 찬혁이 언제까지고 열일곱 청소년 찬혁이길 바라는듯하다. 찬혁 본인이 신경 안 쓰니 내가 이러고 있는 것도 웃기지만,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 이찬혁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어른 되는 과정이 이런 식으로 남들 앞에 놓여 횟감 뜨듯 조각나 납작하게 매도되고 있을지 하는 마음에.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펄렁, 대중 보시기 마땅합니까?


연예인은 어쩔 수 없이 대중에게 일부분의 모습만 보이게 되고, 그러므로 연예인이 견뎌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별달리 해줄 말은 없다. 다만 나는 저어한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연예인에 대한 놀림을 쉽게 입에 올리는 사람들은 대상이 연예인이기 때문에 올리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무고한 사람에 대한 재단과 비아냥과 현실성을 가장한 냉소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 세상은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너무나 많은, 납작납작 고달픈 박수근 화법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냉소와 블랙코미디가 필요한 세상이라지만, 냉소가 불필요한 대상에 대한 냉소는 그저 상처로 남을 뿐이다.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놓고 바라보는 것은 좋다. 그건 때로는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은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놓고 보지 말자.


대신에 악뮤의 작별 인사에 귀를 기울여 보라. 아니, 악뮤가 우리 곁을 떠난다는 게 아니다. 떠난 이가 남은 이에게 보내는 편지다. 먼저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들이 참 많은 위로를 받고 있는 노래다. 가만히 귀기울여보고, 떠난 이가 있다면 그를 생각하고, 없다면 언젠가는 떠나보낼 수도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라. 찬혁의 과도함이 만들어낸 과도하지 않은 잔잔함을….






오 거대한 너의 그림자를 동경해

이 넓은 바다를 누비는 너의 여유


악뮤-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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