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역병은 인류역사에서 최초로 기록된 판데믹이다. 역사를 사실적으로 기술하기 시작한 최초의 역사가인 투키디데스에 의해 기록되었다. 역병 속에서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의 철학자들이 활약을 했고, 소포클래스는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써 디오니소스 원형극장에서 공연을 하였다. 역경 속에서 문명의 꽃을 피운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아테네 역병은 기원전 431년에 발발하였는데, 인구의 1/4인 7만 5천 명에서 10만 명이 사망하였다.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으나, 여러 가지 질병이 동시에 발생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역병으로 사망하였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한 투키디데스는 병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역병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당시의 아테네는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지중해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에게 해 연안 도시국가들과 연맹(델로스동맹)을 맺어 맹주가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에 참여하여 승리를 이끈 하층민과 귀족이 똑같은 참정권을 가짐으로써 민주주의를 시작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등장해 학문과 예술이 꽃을 피웠다.
한편 아테네의 번성과 힘에 위협을 느낀 다른 도시 국가들이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맺어 아테네의 힘을 견제하게 이른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 스파르타 간의 전쟁이 임박하게 된 것이다. 전쟁의 서막은 스파르타가 열었다. 아테네는 해군력이 강했고, 스파르타는 육군력이 강해서 전쟁은 해군 대 육군의 양상이 되었다.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 성안에서 농성전술을 펼치는 한편 막강한 해군을 이용하여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에 타격을 입혔다. 아크로폴리스에서 항구까지 방벽에 둘려 쌓인 직선 도로가 있었는데 적이 침략하면 주민은 아크로폴리스에 들어가 성문을 굳게 잠그고 병사들은 이 도로로 은밀하고 잽싸게 이동해 함선에 올라 비어있는 적의 함대를 부수고 불을 질렀다. 전쟁은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했지만 곧 전염병의 암울한 그림자가 아테네를 뒤덮게 되었다.
당시의 역사가인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듬해 펠로폰네소스 인들과 그 동맹군은 앗티케에 쳐들어 왔는데 그들은 진을 치자마자 나라를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앗티케에 머물고 며칠 되지 않아 아테나이인들 사이에 처음으로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전에도 렘노스 등지에서 역병이 돌았다는 보고는 있었지만 이토록 역병이 창궐해 인명 손실이 크게 났다는 기록은 아무 데도 없었다. 처음에는 무슨 병인지 몰라 의사들이 제대로 치료할 수 없었다. 환자들과 접촉이 잦으니 실제로 의사들이 가장 많이 죽었다. 인간의 그 밖의 기술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신전에 가서 탄원을 해도, 신탁에 물어도, 그밖에 이와 비슷한 행위를 해도 소용없기는 매일반이었다. 마침내 사람들은 재난에 패배하여 그런 짓도 포기하고 말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 47장)”
투키디데스는 자신이 역병에 걸렸기에 증상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역병의 증상은 이러하다.
“처음에는 열이 심하게 나고, 눈이 충혈되었으며 입과 목구멍과 혀에서 피가 나고, 가슴이 아프면서 기침이 심해진다. 열이 복부까지 내려가면 복통이 일어나고 심한 구토가 동반된다. 이어 심하게 경련하고 피부에 작은 농포와 궤양이 생긴다. 몸속이 너무 뜨거워 열을 견딜 수 없고, 쉬거나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통이 지속된다. 설사한 뒤에는 탈수 탓에 갈증이 심해지고 헛것이 보인다. 증상이 처음에는 머리에서 나타나 온몸으로 퍼지며 목숨을 겨우 건진 사람도 손가락, 발가락, 성기가 파괴되기도 한다. 일부는 눈이 멀고, 기억을 잃어 친지는 물론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 못 하는 사람도 있다.”
증상을 매우 자세히 기록했으나, 의사인 필자가 보아도 도무지 무슨 병인지 알 수가 없다. 피부에 작은 농포와 궤양이 생기는 것으로 보아서는 천연두 같기도 하지만, 손 발가락이 파괴된 것은 흑사병 같기도 하고, 입과 목구멍, 혀에서 피가 나는 것은 홍역 같기도 하다. 어느 한 병으로 증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병들이 함께 발생한 것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테네 역병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여러 질환을 열거하지만, 어떤 병이라 딱 꼬집어 말하지 못하고 있다.
아테네 역병은 펠레포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고 한 해가 지나 아테네를 덮쳤다. 당시에 전쟁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아크로폴리스로 이동해 인구가 갑자기 증가하여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투키디데스는 참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병을 앓는 사람 가까이에만 가도 순식간에 전염됐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가까이 있으려 하지 않았다. 모두들 환자를 버리고 떠났다. 환자는 치료받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버려진 시체도 문제였다. 시체를 파먹은 들짐승이나 날짐승마저 죽자 공포와 처참함은 극에 달했다.”
아테네 침공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펠로폰네소스 연합군은 아테네에서 시체를 화장하는 연기가 그치지 않자 침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아테네 역병은 2년간 계속되다가 진정의 기미를 보이더니, 3년 뒤에 또다시 크게 번졌다. 두 차례 역병으로 10만 명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아테네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명장인 페리클래스도 역병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아테네는 최고의 정점이 몰락의 시작점임을 보여 주듯이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30년이 채 안되어 스파르타에 항복하고 말았다. 최초의 민주주의 정치도 스파르타식의 과두정치 체제로 바뀌어야만 했으며, 지중해 무역권도 빼앗겨 버렸다. 역병으로 인해 아테네뿐만이 아니라 그리스 전체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몰락하는 아테네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아테나이는 이 역병 탓에 무법천지가 되기 시작했다. 운세가 돌변하여 부자들이 갑자기 죽고 전에는 무일푼이던 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물려받는 것을 보고 이제 사람들은 전에는 은폐하곤 하던 쾌락을 공공연하게 탐닉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숨도 재물도 덧없는 것으로 보고 가진 돈을 향락에 재빨리 써버리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목표를 이루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고상해 보이는 목표를 위해 사서 고생을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의 쾌락과 그것에 이바지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고상하고 유용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
투키디데스는 또 사람들이 더 이상 신을 믿지 않고, 법도 따르지 않는 과정도 서술하고 있다.
“신들에 대한 두려움도 인간의 법도 효력이 없었다. 신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하자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죽음 앞에서는 어떤 차이도 없다는 것을 보게 되자 사람들은 신을 경배하든 경배하지 않든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법에 대해서 말하자면, 재판까지 가서 처벌을 받고 죽게 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보다 더 가혹한 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판단하였고, 죽음이 집행되기 전에 인생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 53장)
2500년 전의 글이지만 바로 오늘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과학문명이 고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시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이나 고대인의 삶이 본질에서는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