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여왕(1819~1901)은 세계 영토의 1/4, 인구 4억 명을 거느린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국모였지만 아이를 아홉이나 낳아 기른 어머니요 앨버트 공의 사랑받는 아내였다. 빅토리아 여왕이 여덟 번째 임신을 했을 때는 결혼 생활 11년째였다. 당시에는 피임약도 피임도구도 없었고, 임신과 출산은 하늘이 주관하는 일이라 여겼는데 그것은 영국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여왕은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려야 했던 많은 서민 어머니들의 슬픔을 겪지는 않았다.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홉 자녀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큰 탈 없이 잘 성장하였다. 보스턴의 에테르 마취 수술 소식은 이미 영국에도 퍼져 있었고 많은 영국의 외과, 산부인과 의사들이 속속 수술에 마취를 도입하고 있었다. 출산을 앞둔 여왕도 무통 분만에 대해 남편 앨버트 공과 상의를 하였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는 제임스 영 심슨이라는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면 어떤 혁신도 마다하지 않을 산부인과 의사가 있었다. 그가 고안한 출산 도구인 심슨 겸자와, 에어 트랙터는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그는 에테르의 냄새가 지독하여 목을 아프게 만들기 때문에 산부인과에서 쓸 만한 더 나은 흡입마취제를 찾고 있었다. 클로로폼을 들이마시고 매우 만족하였기 때문에 열흘 동안 50명의 환자를 그것으로 마취를 해보고 <에틸에테르보다 더 효율적인 새로운 마취제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유래 없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빅토리아 여왕의 친구였던 서덜랜드 공작부인은 이 논문을 읽자마자. 여왕에게 가져가 보여주었고 여왕은 흥미롭게 읽고 출산을 위해 보관해 두었다.
한편 런던에는 존 스노라는 셜록 홈스를 능가하고도 남을 명석한 젊은 의사가 있었다. 그는 낮에는 런던 소호거리에서 창궐하여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콜레라를 조사하였고, 밤에는 여러 가지 마취제의 최적의 용량과 최적의 흡입 방법을 찾고자 연구하였다. 콜레라의 전파 원인이 미아스마(나쁜 공기)가 아니라 오염된 식수에 있음을 밝혀 급수 펌프의 손잡이를 제거하여 콜레라의 전파를 막아 수많은 런던 시민의 목숨을 건졌다.
John Snow memorial and public house on Broadwick Street, Soho 출처 위키피디아.
존 스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데 우리 시대에의 젊은이에게 정말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라 하겠다. 그는 신분 상승이 어려운 시대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자수성가하였다. 14세 때 의사가 되기를 마음을 먹고 외과의사의 조수로 들어가 일을 하였으며 탄광지역에서 서민들의 힘든 삶, 비위생적인 환경을 보며 그들을 돕기 위해 애를 썼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1837년 스물네 살 때 런던에 입성하였다. 7년 후 1844년 런던 대학을 졸업하여 의사면허를 획득한 후 런던 소호거리에서 외과와 일반의로 개업을 하였지만 의사로서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1850년에 왕립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결코 쉽지 않았을 금주, 금욕주의를 실천하였으며, 철저한 채식 주의자였는데 그것은 그의 강한 의지와 철저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면이었다.
John Snow (15 March 1813 – 16 June 1858) 출처 위키피디아.
그는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의 성별, 체중별 적정량을 연구하고 계산하였으며, 환자에게 에테르를 안전하게 투여할 수 있는 장치를 설계했고 클로로포름을 투여하기 위한 마스크도 설계했지만 그것에 대한 특허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결과를 저술하고 강의를 하느라 사생활 없이 살았지만, 이름이 영국 전역에 시나브로 퍼지면서 많은 외과, 치과의사로부터 마취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는 말하자면 최초의 마취과전문의가 된 셈이었고, 그의 명성은 버킹엄 궁전까지 자자하게 되었다.
앨버트 공은 요새말로 하면 얼리 어답터였다. 혁신적인 기술, 발명품에 열광하는 인물이었다. 여왕의 출산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마취 도입여부는 사실상 문제 제기되지도 않았다. 앨버트 공은 존 스노를 버킹엄 궁으로 불러 클로로폼에 대한 정보와 그가 집도한 수술과 출산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 존 스노가 여왕의 주치가 된 것이었다.
영국 북부의 바이킹 족이 살았던 탄광지역 요크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대영제국 여왕의 주치의까지 되었으니, 존 스노의 신분 상승은 한국으로 치자면 대장금 급이라 하겠다. 여왕은 남편 앨버트 공의 지지로 마취하에 출산하기로 마음을 굳혔으나 왕실 주치의들은 강경하게 반대를 하였다. 마취 없이도 출산을 잘해왔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창세기 3장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라는 구절을 들어 고통 없는 출산은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왕과 앨버트 공의 말을 어길 수는 없었다.
존 스노는 클로로폼의 용량이 과하면 위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여왕의 산통이 시작되자 손수건에 적은 용량의 클로로폼을 묻혀 얼굴에 살포시 덮었다.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한 존 스노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기는 1시 13분에 그 방에서 태어났다. 결과적으로 클로로폼의 마취 효과는 53분 동안 지속되었다. 태반은 몇 분 안에 나왔고 여왕은 멀쩡하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클로로폼의 효과에 매우 고마워했다.’
존 스노는 4년 후 아홉 번째 비어트리스 공주가 태어날 때 다시 한번 마취과 주치의로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앨버트 공은 42세 때 장티푸스에 걸려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장수하여 82세에 사망하였다. 남편 사망으로 크게 상심한 여왕은 일평생 검은 드레스만 입었고 남편의 머리카락이 들어있는 장신구를 착용하고 다녔다. 그녀가 대영제국 최전성기 여왕이라는 막중한 임무에도 불구하고 자기 배로 아홉 자녀를 낳았고, 남편을 지고지순하게 사랑한 아내였음을 생각해 보면, 한 명의 아이도 낳지 않을 뿐 아니라 결혼조차 하지 않은 채로 속절없이 늙어가는 많은 한국인들이 더욱 애처롭게 느껴진다.
존 스노는 1858년 6월 10일 자신의 연구실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당시 그는 45세였다. 자신의 몸에 에테르, 클로로폼 등의 여러 마취제를 실험한 것이 원인이었다. 자고로 남의 생명은 구하지만 자신은 일찍 죽는 것이 영웅의 일이라, 이 영웅도 쓰러진 지 6일 후인 1858년 6월 16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