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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영 Sep 27. 2024

윌리엄 T.G 모턴

처음으로 마취를 시연하다.

1)     


그날은 1846년 10월 16일 금요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흰 셔츠에 프록코트를 차려입은 보스턴의 의사들과 하버드 의대생들이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수술실로 모여들었다. 수술실은 원형 극장처럼 학생들이 수술 장면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존 콜린스 워렌 외과 교수가 수술실로 입장하였다. 그는 늘 자신감에 차있으며 침착하기로 유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설립자 중 하나였고, 미국의사협회 세 번째 회장이었으며, 현재까지도 최고 의학회지라 인정받고 있는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NEJM)을 만든 의학계의 거물이었다. 강의실이자 수술실인 이곳의 강단은 그에게는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처럼 보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공표하였다. “환자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수술할 수 있다는 놀라운 주장을 하는 한 신사분이 찾아왔습니다.”라고.   

  

그러자 그곳에 모여 있던 신사들은 정확히 2년 전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이 떠올라 웅성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호레이스 웰스(1815~48년)라는 치과의사가 통증 없는 수술을 보여주겠다고 이곳에서 수술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웃음가스로 알려져 있는 아산화질소를 사용하여 무통 치과 시술을 12 케이스나 성공하였던 치과 의사였다. 그는 아내와 함께 웃음가스 공연을 우연히 관람한 후로 아산화질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가스를 마시고 조수에게 자신의 이를 뽑게 하였는데 그는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무통 시술이 치과뿐 아니라 외과 영역에서도 가능함을 확신하여 보스턴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산화질소의 흡입량을 조절하지 못하여 무통 수술이 실패로 끝나 버렸다. 가스를 마시고 잠시 기절한 것 같았던 환자가 매스로 피부를 절개하자마자 이제까지 수술대의 모든 환자가 그랬던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의대생과 의사들은 그를 조롱하며 사기꾼이라 부르며 내쫓았다. 그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허풍쟁이, 사기꾼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은 오늘도 마찬가지 일거라고 냉소도 하였지만, 성공만 한다면 의학의 일대 혁신이 일어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는 기대도 하였기 때문에 수술장의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통 수술을 하겠다는 당사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주인공이 도착하지 않는 걸 보니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나 보네요.”라고 워렌 교수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하자 강당에서 웃음소리가 왁자하게 터져 나왔다. 이번에도 허풍쟁이에게 속았다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20분을 기다렸으나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자 워렌 교수는 수술을 하기로 한 턱밑에 양성 종양이 있는 환자 길버트 애벗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수술실 문을 헐떡거리며 열고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그가 윌리엄 토머스 그린 모턴(1819–68년)이었다.      


그는 보스턴에 개업하고 있는 치과 의사였다.  호레이스 웰스의 동료로 그가 아산화질소로 무통 수술을 시연하는데 실패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의 화학과 교수인 찰스 잭슨으로부터 에테르를 흡입하면 의식을 잃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통증을 없애는 마취제로 에테르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연이 있기 2주 전에  치통으로 고생하고 있던 음악가 이벤 프로스트의 충치를 에테르 마취하에 무통 발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성공으로 앞으로 세상이 변하게 될 것이며 자신은 평생 돈과 명예가 따르는 유명인사가 될 것임을 예감하여 워렌 교수에게 편지를 보냈고, 워렌 교수로부터 2주 후 금요일 아침에 시연할 테니 모든 준비를 하라는 답신을 받았다. 그는 유리로 만든 액체 흡입기를 제작자와 시연 직전까지 수정하였고 완성된 제품을 받아 겨드랑이에 끼고 숨을 헐떡거리며 수술실에 들어왔던 것이다.      


모턴은 수상한 액체가 들어있는 유리병을 보고 겁에 질려있던 에벗에 다가가 안전하니 걱정 말라며 다정하게 말한 뒤 유리병을 코와 입에 가까이 대고 숨을 들이켜게 하였다. 에벗은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눈이 돌아갔으며 고개를 뒤로 재끼게 되었고 목의 커다란 혹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자 모턴은 워렌에게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고 말했다. 소독의 개념이 없던 시기라 워렌은 수술 부위와 칼을 헝겊으로 한번 쓱 닦고서 목을 그었다. 노련한 외과의로서 수술 때마다 빠짐없이 들어왔던 환자의 신음, 비명을 그는 듣지 못했다. 환자가 약간 움찔대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무반응과 다름없었다. 수술장은 흥분과 놀라움으로 가득 찼고 수술은 5분 만에 끝나버렸다.      


냉철하기로 소문났던 워렌도 청중만큼이나 놀라고 흥분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술을 다 마치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의학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말 중 하나로 기록될 말을 내뱉었다.    

 

“신사 여러분. 이것은 사기가 아닙니다.”      


그렇다. 그것은 사기가 아니었다. 기적이었으며, 축복이었으며, 혁명이었다. 며칠 후 모턴은 당시 최첨단 수술이었던 다리 절단술에 에테르를 사용하였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날카로운 톱이 가장 통증에 예민한 골막에 닿았을 때도 환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The First Operation Under Ether" by Robert C. Hinckley 1846



윌리엄 모턴의 에테르 흡입기


2)     


수술 성공 소식은 석 달 후 영국에도 전해졌다. 리버풀의 한 신문은 12월 18일 이에 대한 보도를 처음으로 게재하였다. 런던의 스타 외과 의사인 리스턴은 1846년 12월 21일 런던의 수술실에서 유럽에서 처음으로 에테르 마취를 사용했다. 그는 사고로 다리를 다쳤으나 당시 병원의 위생상태로는 심한 감염이 이상할 것이 없는 처칠이라는 집사의 다리를 25초라는 기록적인 시간 안에 절단하였다. 처칠은 마취에서 깨어난 후 자신의 다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잘려 있는 것을 보고 두 번째로 혼절하였다.      


1847년 1월 24일 독일 에를랑겐의 외과의 요한 페르니난트 헤이펠더는 독일에서 처음으로 에테르 마취수술을 했다, 첫 번째 수술은 왼쪽 엉덩이에 생긴 커다란 고름집으로 고통받던 26세의 젊은이였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그 해 3월에 100건의 에테르 마취수술을 해냈다.   

   

에테르 마취수술이 많아지자 1847년 2월에 마취로 인한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고, 뒤이어 여러 환자들이 마취 중 사망했다는 사실이 의학 잡지와 신문에 실리게 되었다. 흡입된 가스가 심장과 순환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당시 의사들의 무지와, 순전히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감’에 의존한 채 에테르를 수건에 묻힌 후 환자의 얼굴에 덮는 조잡한 방법으로 마취를 하였으니 사망자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였다. 에테르 마취는 모턴의 시연 후 1년 만에 과거의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의사들은 마취로 에테르보다 클로로폼을 더 신뢰하기 시작했다.      


모턴은 자신이 마취제로 사용한 물질에 대해 '레테온'이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받으려고 시도했지만 "레테온"은 곧 에테르로 밝혀져 특허는 취소되었고 특허료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모턴은 자신의 발명이 인류에 도움이 되고자 바랐지만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기를 바랐다. 당시 미국은 확장 일로에 있었으며 록펠러, 카네기, 밴더빌트 같은 억만장자들이 나왔던 때라 발명으로 돈을 쓸어 담겠다는 야망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돈도 벌지 못했지만, 최초의 마취제 발명이라는 명예도 얻지 못했다. 그는 여생을 자신의 발견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미의회를 설득하는데 보내다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화학과 교수인 찰스 잭슨은 자신이 에테르 마취의 창시자라고 주장하여 그와 지루한 법정 다툼을 벌였다. 거기에 자신이 최초라고 주장하는 자가 또 나타났는데 그가 윌리엄 크로퍼드 롱이다. 남부 조지아주의 외딴 마을 제퍼슨에서 외과의사로 일하던 그는 모턴이 매사추세츠 병원에서 마취 시연을 하기 4년 전부터 에테르를 사용해 여러 번 수술을 하였다. 그는 마취로 인류를 구하기보다는 혼자만의 비법으로 간직하고 싶어 했다. 특허권 분쟁이 터지자 주위 사람들의 부추김에 넘어가 그도 참여하기로 했다. 특허권을 두고 잭슨, 모턴, 그리고 롱이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웃음 가스를 사용하였던 호레이스 웰스도 자신이 취초의 마취제 발명가라는 타이틀을 갖기 위한 열망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1848년 여러 명의 매춘부에게 염산을 뿌린 죄로 뉴욕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감방에서 “내 머리가 불타고 있다.”라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아산화질소를 들어마시고 의식이 희미해질 때쯤 스스로 손목을 그었다.  

    

모턴은 의학의 황금기에 나타난 영웅이 아니라, 의사들이 마취제 성분이 무엇인지 실토하지 않으면 어떤 수술도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위협에 넘어가 에테르임을 밝힌 심약하고 순진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중 앞에서 처음으로 마취를 선보여 인류가 고통 없는 수술로 병소를 제거하는데 기틀을 마련한 것만은 분명하다. 마취학과 외과학의 비약적 발전에 기폭제가 되었던 선구자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행운을 누리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애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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