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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영 Sep 20. 2024

이프레임 맥도웰

마취 없이 난소의 거대 종양을 적출한 복부 수술의 대가


고대부터 수술이라는 것은 격심한 통증, 환자의 심한 발버둥, 고막을 찢는 울부짖음과 운명적인 동반자였다. 그래서 마취가 발명되기 전까지 수 천 년 동안 수술은 발전 없이 그대로였다. 당시 수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2차 감염을 막는 것도, 출혈을 막는 것도, 정확함도 아니었다. 환자가 격렬한 통증에 의한 쇼크로 죽기 전에 수술을 끝내는 것이었다. 아무리 건장한 보조인들이 환자의 손발을 묶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눌러도 환자의 발버둥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개복술, 개흉술 같은 복잡한 수술은 할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수술은 썩어가는 팔다리를 재빨리 절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외과의는 doctor라는 말 대신 Mister로 불렸으며 수술도 집안의 식탁이나 전쟁터에서 주로 시행되었다.      


손놀림이 빠른 의사가 최고의 외과의였는데 나폴레옹의 개인 외과 의사였던 장 도미니크 라레는 2분 만에 어깨 관절에서 팔을 절단할 수 있었다. 1846년에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외과 의사였던 런던의 로버트 리스턴 Robert Liston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민첩한 수술 속도를 자랑했는데 한 번은 환자의 허벅지를 절단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환자의 고환과 조수의 손가락 두 개를 절단하기도 했다. 수술 시간이 외과의사의 평판과 수입을 좌우하였기 때문에 조수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수술 시간을 정확히 재는 것이었다.   

   

18-19세기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의과대학은 당시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의사 지망생들이 유학을 했다. 에든버러 의과 대학은 늘 의대생 교육용 카데바가 부족했다. 시체를 도굴하여 공급하던 시체 도굴범이 있었는데, 시체 도굴을 당하지 않기 위해 주민들이 시체를 며칠씩 지키자 이 도굴범들은 살인을 하여 돈을 받고 카데바를 공급하였다. 그것이 유명한 에든버러 연쇄살인 사건이다. 살인범들은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했고, 에든버러 의과대학의 해부실 부검대에 올라 실습용 카데바가 되었으며, 유골은 골학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이프레임 맥도웰(1771~1830)은 미국 태생으로 에든버러 의과 대학에서 유학을 했다. 미국으로 돌아와 켄터키 주 댄빌이라는 인구 2-3백 명의 작은 마을에서 개업을 하였다, 이때가 1794년이었다. 유학파가 대도시 종합병원이 아닌 시골 소도시에서 개업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방광에 생긴 결석이나 탈장을 수술하여 수술의 불모지에서 유능한 외과의로 이름을 조금씩 알려 나갔다. 그러던 중 네 아이의 어머니인 46세의 제인 크로포드라는 환자를 의뢰받았다.      


그녀는 임신한 줄 알고 있었지만, 출산일이 훨씬 지났는데도 출산은 없고 배가 단단하게 뭉친 채 커져 있는 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맥도웰은 그녀가 살고 있는 그린카운티로 왕진을 갔다. 그때가 1809년 12월 13일이었다. 그는 그녀를 보고 단번에 난소 종양을 앓고 있음을 알았고 수술로 종양을 제거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녀에게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개업하고 있는 곳으로 오면 수술을 해주겠다고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린카운티에서 댄빌까지는 100km나 떨어져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일반 사람들이 마을 교회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멀리 가는 일은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때문에 맥도웰은 그녀가 댄빌까지 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종양을 안고 고통받으며 사느니 차라리 수술받다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녀는 늑대와 곰이 출몰하고, 인디언의 습격도 있을지 모르며,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길을 혼자서 4일 동안 말을 타고 그가 개업하고 있는 의원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목숨을 건 여행이었다. 맥도웰은 그녀의 강한 의지에 놀라고 감탄하였으므로 수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술은 일주일 후 성탄절에 하기로 하였다.      


수술에 대한 소문이 작은 마을에서 삽시간에 퍼져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수술 당일 마을의 교회에는 살아 있는 사람의 배를 가르는 무모한 짓은 악마나 하는 짓이라고 수술을 강력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맥도웰은 에든버러 의과대학에서 수차례 카데바의 복강을 열어 본 적은 있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복강을 열어 본 적은 없었다. 그야말로 세계최초의 수술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수술 보조는 필라델피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돌아온 조카가 하게 되었다. 마취도 소독제도 없었던 때였다. 제인 크로포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맥도웰은 매스로 과감하게 그녀의 배를 갈랐다. 내장이 종양에 밀려 밖으로 쏟아져 나왔고 어른 머리만 한 거대한 종양이 드러났다. 맥도월은 종양의 아래를 실로 묶은 다음 종양을 절개하여 내용물을 긁어 배출한 후 자궁과 붙어있던 종양 덩어리를 분리해 적출하였다. 환자를 모로 기울여 배속에 고인 혈액을 쏟아낸 후 내장을 손으로 차곡차곡 복강 내로 밀어 넣은 후 복벽을 봉합하였다. 수술은 25분 만에 끝났다. 제인 크로포트는 찬송가를 부르다가 기절하였으나, 수술 후 깨어났다.   

   

교회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수술을 막아야 한다며 맥도웰의 진료실로 쳐들어가려고 하였기 때문에 수술이 조금이라도 늦어졌다면 수술 도중에 크로프트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교회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충격과 놀라움 그리고 기쁨이 혼재된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환자는 수술 5일째 침대에서 일어나 걸었고, 25일째 혼자서 말을 타고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올 때 가지고 있던 아랫배를 짓누르던 종양덩어리의 통증과 수술에 대한 근심 걱정을 전부 떨치고 홀가분한 몸과 마음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녀는 78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살았던 그린카운티에는 그녀를 기념하는 제인토드 크로포드 병원이 세워졌다. 그러나 맥도웰은 자신을 수술해 줄 외과의를 찾지 못해 1830년 충수염에 의한 복막염으로 59세에 사망하였다.      




제인 토드 크로포드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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