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학사에 입문을 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사람이 이그나츠 제멜바이스이다. 필자는 그를 현대의학의 문을 열어주는 사람, 혹은 죽음의 손을 삶의 손으로 바꾼 사람이라 여긴다.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1818-1865 출처 위키피디아
제멜바이스는 헝가리 태생의 산부인과 의사로 오스트리아 비엔나 종합병원에서 산모들을 돌보았다. 산부인과병동은 1 병동과 2 병동이 있었다. 비엔나 종합병원은 18세기 중반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개혁을 꿈꾸었던 신성로마제국의 요제프 황제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산부인과 병동, 정신과 병동, 소아병동도 있었다고 한다. 당대의 명망 있는 의사들이 모여 환자를 돌보았다.
산부인과 병동에서는 많은 산모들이 산욕열로 사망하였는데 의사와 의대생이 담당했던 1 병동이 산파들이 담당했던 2병 동보다 산욕열로 사망하는 산모가 더 많았다. 그 원인을 단순히 남자들인 의사와 의대생이 여성인 산파들보다 산모를 덜 섬세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멜바이스는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1 병동은 사체를 해부하고 검시하던 해부실과 가까이 있었다. 해부실은 사체에서 나오는 각종분비물, 피, 사체의 조각, 내장 등이 널려 있었고 지독한 냄새가 났다. 당시에는 위생에 대한 관념이 생기기 전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눈의 한계를 믿지 않는 시대였다. 시체를 해부하던 손으로 진통이 오는 산모를 진찰하고 아이를 받았다. 1병 동의 산욕열 사망환자는 무려 20%에 육박했다.
그러던 중에 제멜바이스의 절친한 동료인 콜레치카가 해부실에서 시체를 해부하다가 실수로 칼에 손이 베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손가락이 심하게 부어오르고 전신에 열이 나더니 혼수상태에 빠져 3일 만에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
콜레치카는 자신이 그렇게 많은 사체를 해부하던 부검대에 자신이 눕게 되리라는 것을, 제멜바이스는 절친 콜레치카를 자신이 부검하게 될 것임을 결코 몰랐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우연한 사건은 제멜바이스와 앞으로 임신하여 아기를 낳게 될 모든 여성들에게는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산욕열로 사망한 산모의 상태와 콜레치카의 상태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콜레치카는 손부터 시작하여 팔과 폐까지 고름으로 차 있었고 폐부종, 폐렴, 늑막염의 소견이 있었으며 한쪽 눈이 튀어나와 있었다. 혈관은 염증으로 막혀있었고 거의 모든 장기가 종기로 뒤덮여 있었다. 산욕열로 사망한 산모는 자궁부터 곤죽이 된 것처럼 부패되어 있었고 거의 모든 장기에 염증이 퍼져 있었고 혈관이 막혀있었으며 내부의 팽창으로 눈두덩이 부어 있었고 눈알이 빠져 있기도 하였다.
제멜바이스는 절친의 죽음으로 비로소 왜 산모들이 산욕열로 죽게 되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시체에 있던 어떤 치명적인 물질이 손에 묻게 되는데 그 손으로 산모를 진찰할 때 그 물질이 산모의 몸속으로 들어가 산모에게 염증을 일으켜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산모가 산욕열로 죽은 것은 나쁜 공기나, 우주의 흐름, 어두운 기운, 산모의 약한 체력, 신앙의 부족, 덜 섬세함 때문이 아니라 의사의 더러운 손 때문이라는 것, 그동안 자신과 동료 의사들 그리고 의대생들이 산모를 죽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손 씻기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1847년 5월 초부터 산부인과 제1병동 입구의 세면대 앞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적힌 표지판이 세워졌다.
“오늘부터 부검실에서 나오는 모든 의사나 학생은 산부인과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 놓인 세면대에서 손을 제대로 씻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규칙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
I. P. 제멜바이스 “
손 씻기를 하기 직전 1847년 4월 기준으로 산욕열로 인한 산모의 사망률은 18.27% 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 씻기가 도입된 5월에는 사망률이 12.24퍼센트까지 떨어졌다. 감염이 가장 많이 있는 여름철인 6월에는 2.2퍼센트, 7월에는 1.2퍼센트, 8월에는 1.9퍼센트까지 사망률이 떨어졌다. 처음으로 제2병 동보다 제1병동에서 출산 중 사망한 여성의 숫자가 적어진 것이다.
그런데 다시 10월에 환자 12명 중 11명이 같은 병실에서 사망했다. 제멜바이스는 곧바로 하나의 요인을 의심했다. 병실 첫 번째 침대에 자궁암에 걸린 환자가 누워 있었던 것이다. 1847년에는 암 치료가 불가능했으므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이 치명적인 상피성 암은 만성적으로 감염을 야기했다. 당시 환자들이 줄지어 누워 있는 침대를 따라 병동으로 들어온 의사와 학생들은 일단 첫 번째 침대의 자궁암 환자를 먼저 진찰하고 다음번 침대의 환자를 진찰한 것이었다.
제멜바이스는 해결책을 찾아냈지만, 그것은 당시로는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부인과 검사를 마친 후 매번 새로운 환자와 접촉하기 전에 염화석회 용액으로 손을 씻으라는 것이었다. 그 지시에 대한 저항은 격렬했고 산부인과 과장인 클라인 교수는 자신의 제자이자 조수였던 제멜바이스에 대한 미움을 더욱 키워나갔다. 제멜바이스는 자신의 이론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사람들을 몰아붙였다. 덕분에 염화석회 용액에 담근 의사와 의대생들의 손은 항상 벌겋게 달아오르고 쓰리고 가려운 상태였다. 그만큼 그의 인기도 바닥을 치게 되었다. 하지만 제멜바이스는 멈추지 않았다. 1848년 3월과 연이어 8월에 그는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몇 달 동안 산욕열로 사망한 환자가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클라인이 보기에 제멜바이스는 '급진적 이론으로 기존 체계를 완전히 뒤집고 유명해지기 위해 사고를 치고 다니는 풋내기'였고, 이에 둘은 지속적으로 충돌하다 결국 클라인은 제멜바이스의 재계약을 거절하였다.
제멜바이스는 책을 출판하여 만회를 시도하였지만, 반대로 부정적인 비평만 받았다. 그가 쓴 『산욕열의 원인, 개념, 예방』(1861년)은 전문가들도 읽기 어렵게 투박하고 난해하게 쓰였으며, 특히 의학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들이 읽었을 때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공격적이고 격앙된 문체로 쓰였다. 예를 들면 손을 씻지 않은 의사들을 "암살자들", “학교에 남아있는 적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복수는 바로 사망률 감소다.”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사망한 산모들을 세세하게 예를 들어 설명하였으며, 의학계에 대한 비난을 화풀이하는 듯이 썼다.
제멜바이스는 고향인 헝가리로 돌아와 부다페스트에 있는 세인트 로쿠스 병원(St. Rochus Hospital)에서 무보수로 일을 했다. 그가 부임하자 산욕열에 의한 사망률은 단 시간에 0.8%로 감소하였지만, 그가 떠난 비엔나 병원의 사망률은 다시 15%로 치솟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에 대한 반발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동료들이 인정하지 않자, 그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다. 마침내 그의 행동은 균형을 잃었고 1860년부터는 이상한 행동을 자주 보였으며, 1865년 정신병원에 갇혔다. 그의 동료 중 한 명이 그에게 새로운 병원에 가보자고 설득했고, 그를 정신병원으로 데려간 것이다. 이후 제멜바이스가 상황을 눈치채고 도망치려 하자 경비원들이 그를 심하게 폭행했다. 그리고는 구속복을 입히고 어두운 방에 그를 가뒀다. 그로부터 2주 후 독방에 갇힌 그는 오른손 중지에 난 상처에서 시작된, 자신이 그토록 막고자 했던 화농성 염증,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손 씻기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건진 그가 그토록 막고자 했던 감염으로 사망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는 콜레치카와, 산욕열로 사망한 많은 산모들이 누웠던 부검대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는데, 그의 부검소견은 콜레치카와 산욕열로 사망한 산모들과 같았다.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제멜바이스는 아무도 손 씻기를 하지 않던 시대를 모든 사람이 손 씻기를 하는 시대로 만든 선각자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자신의 확신을 반대자들에게 너무 거칠게 몰아붙여 자신의 정신이 황폐하게 된 점이다. 조금 유연하게 했다면 비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부분의 불행한 선각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사후에 인정을 받았다. 프랑스의 세균학자 파스퇴르의 세균이론이 정설이 되고, 조지프 리스터의 소독법이 광범위하게 행해지자 손 씻기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1906년 부다페스트 광장에 그를 기리는 동상을 세워졌고, 1969년에는 부다페스트에 제멜바이스 대학교(Semmelweis University)를 세워 이 외로운 선각자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