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 성형수술을 시작한 유대인 의사
제이콥 르윈 요세프 < Jakob Lewin (Jacques) Joseph >는 1865년 동프로이센제국의 주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쾨니히스베르크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떠나지 않았던 도시로 유명하다. 2차 대전 후 포츠담 협정에 의해 소련의 영토가 되어 칼리닌그라드로 지명이 바뀌었다.
그는 랍비의 아들로 태어나 유대인 전통에 따라 14세 때 프로이센 제국의 수도 베를린으로 보내졌다. 고등학교 시절 이름을 프랑스식인 자크 요세프로 개명하였다. 1885년부터 1889년까지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890년에 라이프치히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부유한 유대인 곡물 상인의 딸 레오 노레 콘과 결혼을 하였는데 이 결혼은 그가 평범한 일반의가 아닌 전문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부채질하였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일반의로 개업을 하였으나 그만두고 당시 베를린 정형외과병원에서 이름을 날리던 유대인 의사 율리우스 볼프 교수 밑에서 정형외과 수련의로 새 출발 하였다.
19세기말의 외과 영역에서의 혁신적 발전 상황을 잠시 살펴보면 이렇다. 마취와 소독제가 광범히 쓰이면서 수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던 충수돌기염, 담낭염에 의한 복막염이 수술로 정복되기 시작했다. 수천 년 동안 수술의 미지의 영역이었던 심장, 위, 식도, 갑상선까지 매스가 그어졌으며 대담하고 창의적인 수술법과 수술기구들이 고안되었다. 루트비히 렌은 가슴을 열고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을 수술했다. 테오도어 빌로트는 위암 절제술을 하였는데 그의 수술 기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명명되어 불리고 있으며, 스위스의 외과 의사 에밀 테오도어 코허는 갑상선 제거수술을 하였다. 수술은 더 이상 응급상황에서 행해졌던 최후의 치료술이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이 세기말에 싹트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생명에 지장은 없으나 다른 사람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고통받던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되었다.
베를린 시민에게 뼈 늑대(Knochen wolff)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했던 정형외과의 선구자 율리우스 볼프 교수는 자크 요세프를 후계자가 될 재목으로 여겨 교육에 큰 관심을 쏟았지만 하나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돈독한 관계에 금이 가고 말았다.
어느 날 자크 요세프는 당나귀 귀로 놀림받아 학교 가기를 거부하던 10살짜리 소년의 어머니로부터 수술을 의뢰받았는데 반유대인 정서로 오래 동안 차별받아왔던 자크 요세프는 소년과 어머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소년의 귀를 수술하기로 했고, 세심하게 수술계획을 세웠으며, 수술은 성공하였다.
그는 자신의 수술을 베를린 의학회에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지만, 스승 볼프 교수는 심기가 불편했다. 그에게 귀를 축소한 미용수술 따위는 정형외과의 명성을 해치는 것이었다. 자크는 스승의 미움을 받아 수련을 다 마치지 못하고 일반의로 처음 개업하였던 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98년 자크의 진료실에 28세의 한 남성이 찾아왔는데 그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자크는 그가 왜 왔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코가 어마어마하게 컸기 때문이었다. 근사하게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후각기관의 거대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거대한 코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볼 때마다 고개를 돌렸는데 그것은 자크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외면하고 수근 거리는 바람에 비록 프로이센의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고 지독히도 외로웠으며 우울했다. 자크는 이번에도 섬세하게 수술계획을 짰다. 그리고 해부학자인 하인리히 빌헬름의 연구소에서 최근에 사망한 사람의 코로 여러 차례 수술 연습을 하였다.
환자의 코는 자크의 수술로 정상 크기로 축소되었다. 수술은 1시 만에 끝났으며 아무런 합병증도 없었다. 평소에 과묵하고 냉정하여 차가운 인간으로 평가받았던 자크였지만, 수술로 자신감을 회복하고 즐거워하는 환자의 모습을 보고 흐뭇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자크는 그 후 몇 년에 걸쳐 자신의 코 수술 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진료실을 확장하여 성형 전문 병원을 만들었다. 베를린 시민으로부터 '나센-조셉'(코-조셉) 또는 '노즈프'로 불렸으며 독일 전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사진술의 발달은 의학서적 출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는 수술 전후를 사진을 찍어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것을 본 의사들은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고 여겼던 외모를 수술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며 육체뿐 아니라 마음을 회복시킬 수 있음을 알고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자크는 예비군 참모의사직을 맡게 되었다. 1차 세계 대전은 한층 강력해진 무기로 많은 사상자를 냈고, 외상도 처참하였는데 특히 참호에서 머리만 내놓고 총격전을 했기 때문에 안면부 외상이 많았다. 자크는 유대인이었지만, 독일을 조국이라 생각했다. 그는 애국심에 불타 헌신적으로 수술을 했으며, 안면 성형과 재건 분야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공로로 독일 황제로부터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전쟁 후 자크는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가 자신의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의 명성은 유럽전역은 물론 미국에 퍼져 많은 의사들이 앞 다투어 제자가 되려고 찾아왔고 제자들은 배운 수술기법을 가지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 고국의 성형외과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28년과 1929년에 자크는 '비강 성형외과 및 기타 안면 시술, 그리고 유방 성형외과 Nasenplastik und sonstige Gesichtsplastik nebst Mammaplastik‘를 집필하였는데 이 책은 성형외과뿐 아니라 의학사에 기념비적인 출판물이다. 초판본은 출판물 중의 걸작으로 평가받아 의학책으로는 드물게 최고가로 감정받는다. 저자 자크뿐만 아니라 삽화를 그린 일러스트레이터, 출판사 팀의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디자인, 레이아웃, 예술적이며 기술의 우수성을 드러낸 흑백 사진은 소장자가 소중하게 보존하여 후세에게 물려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기에 충분하였다.
1931년 독일에서 전체주의가 확립되자 모든 유대인에게 재앙이 닥쳤다. 모든 독일인에게 존경받던 자크는 하루아침에 반국가사범으로 몰려 게슈타포인 개인 비서에게 감시당하게 되었다. 폭력적인 반유대주의의 물결은 그의 사생활과 진료에 큰 타격을 주었는데 환자는 점차 발길을 끊었고 이로 인해 자크는 크게 낙심하였다. 그러다 1934년 2월 12일 자신의 병원으로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다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나치의 정치 깡패들로부터 반복적으로 받은 부당한 대우와 통제가 심근경색을 일으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나치는 그의 죽음에 관심이 없었고, 언론은 보도하지 않았다. 그의 부고는 해외 매체에만 실렸고, 장례식에는 그의 가족과 제자만 참석하였다. 베를린의 유대인 묘지에 안장되었지만, 2차 대전 중 폭격되어 그마저 사라졌으나, 그로부터 70년 후 파괴된 묘지에서 그의 묘비 잔해가 발견되어 2004년 추도식을 열고 재 안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