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학년 2학기는 그와의 어설픈 만남이 없어지고
전공분야를 선택하고 논문 주제를 정하는 등 학업위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나도 모르게 지도교수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미 현재 조교를 비롯하여 교수까지 내가 연구실로 들어가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데 내 의사는 묻지 않고ᆢ
지금 생각하면 무슨 일의 변화에는 반드시 인과가 있음을 알아야 했는데 그땐 이십 대 초라서 그랬는지
온통 세상은 장밋빛으로만 보였다.
난 2학년 2학기 끝자락부터 지도교수인
대학원 처장실에서 무료 봉사를 하게 된다.
도제식 교육의 명분과 글씨를 속필로 잘 쓴다는 명분으로 스카우트되어 교수의 자잘한 업무 처리와 원고 정리 및 서적 발간을 위한 원고를 대필하고 교정 보는 등의 업무로 4학년 2학기까지 있게 되었다.
석박사 과정의 선배들 학위 논문도 초고만 걸적거려온 지도교수 분은 거의 내 손에서 정제되고 다듬어져 갔고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곰처럼 밤샘하며 나의 일도 아닌 것을 내 것처럼 착각하여 일을 해결해 나갔다.
나의 리포트만 해도 부담일 수 있었고, 업무 분량으로도 보면 힘들고 신경 써야 하는 중요한 것이라 힘들었지만 그때는 힘든 줄을 몰랐고 그렇게 하여 자신을 연마 하고 훈련되는 기회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단계별로 일을 처내듯이 난 어떤 의무감인지 모르지만 묵묵히 처리했다.
난 나름대로 이것을 학업을 위한 통과제의라 생각하고 아무런 사심없이 나를 위로하고 쓰다듬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 하늘이 다 보고 있으니 말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성적은 A장학금을 받았지만 그 장학금 받는다고 교수는 대학원 진학할 제자로 간주한 것 같이 마음대로 불러 일을 시켰고 책임감과 업무 수행력은 신속하여 지도교수를 비롯한 학과 교수들의 신임을 받았다.
집이 대학과 거리가 멀어서 새벽 첫 버스 4시 20분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고 6시쯤 대학도서관에서 2시간 전공 관련 문헌을 탐색하고 논문을 찾아 읽고
내 전공 관련 논문을 읽지 않은 게 없을 정도로 난 열심히 했다.
내가 그렇게 한 이유는 부모의 학식은 높으나 남에게 자식을 위해 도움을 요청할 분도 아닐뿐더러 대학만 보내면 다 알아서 한다는 의견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어떤 성과를 내어야만 대학원 진학을 이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1945 년. 이전의 출생인 부모님들은 초등 졸업이나 초등 중퇴나 아니면 학교 문 앞에도 못 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의식주 여러 면에서 궁핍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런 가운데서도 다른 친구 엄마들보다 고등교육까지 마친 엘리트가 우리 엄마다.
그런 배운 것과는 상반되게 엄마는
"여자는 남편을 잘 만나야지 많이 배우면 남편 우습게 본다." 던가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등
이상야릇한 논리로 무장하여 대학원은 엄두도 못 내게 하였다.
나는 그런 엄마가 무척 못마땅하였다.
4학년 2학기가 되어 대학원과 발령을 두고 고민하였다.
엄마는 편한 길 두고 왜 힘든 길을 가려하느냐고 질책을 하셨지만 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고 중등교사보다는 대학교수가 되는 게 사고의 스캐일이나 지식의 심화나 확장에서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고 삶에 이해타산을 측량해보지는 않았다.
그냥 책 속에 파묻혀서 하고 싶은 것 하며 살면 편안할 것 같아 그러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대학원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쳐서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그때는 공부만 하면 자동으로 교수가 되는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연구실에 2년 정도 있다 보니 볼 것과 안 볼 것들을 보게 되는 것이었다.
무늬만 교수인 사람도 많았고, 사회적 존경의 명함 뒤에는 그들의 보직에 대한 암투와 알력과 삐짐과 학연 아닌자에 대한 다양한 뒷담이 공존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어느 날 흰색 자가용을 타고 어떤 중년 여인이 연구실로 찾아와서 지도 교수를 찾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부재중이라 하였더니 나를 의심하는 듯이 아래위를 쭉 훑어보았다. 난 그 시선이 좀 어색하고
기분이 나빴다.
그녀는 들으라는 듯이 남자의 그릇된 행위들을 막 열거하며 '낙수물이 바위를 뚫는다.' 는 등의 굽힐줄 모르는 기세로 처절하고 누적된 한의 감정들을 유창하게 토로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쏟아낸 말을 바탕으로 조합해 보면 두 사람은 부부였고 그들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으리라 가늠 가능했다.
그때 마침 교수가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 왔다.
나는 부부 문제인 것 같아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는 중앙도서관으로 와서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아내와 별거 중인 지도교수는 알고 보니 무늬만 교수이고 사모님 표현대로는 개망나니였고 아내를 본채에 두고 아래채에서 식모까지 겁탈하고도 부끄러워 않는 바람둥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상습적이란 사실을ᆢ
난 머리가 하얘졌다.
고요한 연못에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처럼
레스토랑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같이 팔짱 끼고 걷는 것을 보았다, 제자들에게 핸드백을 사 주었다 등의
아마도 살금살금 했을지 모를 그의 밀행들이 노출되어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는데도 난 그냥 꾸며진 가십거리로 여겼던 것이다.
그럼 여태껏 회자되던 이야기가, 학과에 떠도는 그의 여성편력이 뜬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란 말인가?
그의 여학생과의 썸 타는 내용이 터무니없는 풍문들이 사실이란 말인가?
연구실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일들인데 난 도서관에 처박혀 있어서 소문에 대해 몰랐던 것이고, 또 어쩌면 소문은 소문일 뿐 확인하지 않은 것은 나의 아집과 사물을 정확히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 나의 편견이 사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난 그날부터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지도교수의 인품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학문적 업적은 자타가 공인하였지만 서른 살 나이에 대학교수가 되어 20년간 탄탄 일로를 걷고 있는 그의 주변에서 야기되는 숱한 이야기가 진실인가? 허구인가?
그 당시에는 남자의 일탈은 어느 정도 묵인 되고 포장되어 어떤 대가로 덮어지는 어두운 사회풍토이기도 한 듯했다.
난 도덕적으로 허물어진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진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 생각 후에 본 지도교수의 얼굴은 역겹다는 느낌도 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대학졸업식날 어머니는 졸업식장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엄마의 입원과 간병으로 대학원을 휴학하게 되면서 나는 자연스레 지도교수 연구실을 나가지 않게 되었다.
엄마가 위독해서 당분간 쉬어야 한다고 전화드렸더니 아무런 말씀이 없었고 2년 이상 무료 봉사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나에 대해선 묵언이었고 그 뒤에 내 책상을 연구실서 빼버렸다는 이야기를 후배에게서 듣게 되었다.
물론 그 조교가 그랬겠지만ᆢ 그 조교는 지도교수의 작은 아내란 이야기가 소문 가운데에 있었고 실제 했
그랬다.
학교 밖에 교수 개인 연구소 개소 한다고 그때 연구실 붙박이 책장 설치비 100 만원을 요구했다.
"제자가 해 드려야 한다."고 조교가 말하길래 난 순진하게
대학원장학금 받은 80 만원에 용돈 20 만원을 보태어
연구소 개소 기념으로 해 주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그 연구소는 지도교수와 조교의 아지트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기도 했다.
난 똥물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았다.그들과의 관계는
내 스스로 단절한 것이다.
일 년 후 나는 중등 학교에 발령을 받아 교직 생활을 시작했고 그 후에는 지도교수를 찾지 않았다.
이따금 연말이 되면 제자들을 동원하여 도서 발간회다 사은회다 뭐다 만들어 자금을 조성하는 추악함도 보였다.
지도교수는 화갑연 논문을 빌미로 현직에 있는 제자들에게 갖은 명분을 부쳐 일일이 금액을 정하여 가가호호 방문하여 상당한 금액을 갹출해 가곤 했다.
처음에 존경했던 우리 동기들도 차츰 실망하고 교수로 보기보다 한 사내로서의 됨됨이에 분노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학 졸업 20년 후 학과 홈커밍데이가 시내 유명호텔에서 있었다. 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라 바쁘기도 하고 가지 않으려 했는데 이런저런 전말을 모르는 동기들은 꼭 참석하라 하여 난 내색않고 그날 참석했다.
오랜만에 뵙는 지도교수의 얼굴은 다소 늙어 있었고
왜소하며 비굴해 보였다.
지도교수는 의사 아내가 된 동기 옆에서 점잖지 못하게 희희덕거리며 비굴한 미소로 그녀의 파진 가슴 선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굳은 얼굴 근육을 애써 푸는 노력을 하는 어색함을 가지고ᆢ
다른 사람들과는 이야기해도 나에겐 한마디도 없었고 나 역시 목례만 하고 기부 하는 등 공식적인 것만 하고 나왔다.
2년 후 7월 쯤 되었을 때이다.
1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평일 11시 30 분 우리 부서 직원끼리 바다가 보고 싶어 회식 장소를 오션뷰가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예약한 후 그곳으로 갔다.
점심시간 이전이고 평일이라 한산하여 좋았다.
저쪽 테이블에 연인 한쌍만 있고.한적하여 이곳이 조용하고 좋다면서 기획 선생이 매우 마음에 들어 하였다.
"이런 시간에 저렇게 데이트하는 사람 부러워요 부장님!" 하는 것이었다.
" 60대와 20대의 만남 같다. "면서 조 선생이 작은 목소리로 비밀스럽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이에 응수해서 박 선생이
"뭐야 샘, 징그럽게 시리. 아버지와 딸이겠지" 했다.
난 그들의 대화가 재미있어 고개를 돌려 그 팀을 보았다.
'아니!'
'지 버릇 개 못 주나 봅니다.' 속언이 생각났지만 내밷지 않았다.
'세상은 참 좁습니다.'
지도교수가 그의 이상형인 젊은 여자와 함께 오붓하게 레스토랑에서 칼질을 하면서 데이트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모른 척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직면하기로 했다. 우리 부서 직원의 양해를 구하고 일어나서 그 테이블로 향해 다가갔다.
난 옷깃을 여미고 정중히 인사하고 우리부서 모임이라 알린 뒤 우리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밥값을 살짝 계산하여 내어 주었다.
우리 부서 직원과 한담을 하는 사이 그 데이트팀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지도교수가 계산대로 가는 것이었다.
레스토랑에서 주인이 "계산 완료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듯하였다.
그는 나를 보더니 구릿빛 얼굴이 더 검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보고 앉은 자세로 목례를 했다.
지도교수와 그렇게 헤어졌다.
한 3년 후쯤 지도교수는 술을 먹고 횡단보도를 건너다 횡사했다는 이야기를 후배가 전해 주었다. 퇴임하기 전인 듯하다.
그의 죽음을 2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들었다.
지도교수는 학문뿐 아니라 인품도 고고 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나의 생각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것이 나의 지나친 엄격함인가?
남을 가르치는 자는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하며 하늘의 명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
이는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이며 이것이 덕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