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와 국악 사이, 내가 되고 있는 목소리에 대하여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뉴욕에서 재즈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며, 나는 자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마주 선다. 어떤 음악을 해야 할까, 어떤 언어로 말해야 할까. 이 물음은 단순한 장르적 고민이 아니라, 정체성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이다. 자연스럽게 국악과 재즈, 두 음악의 접점에 관심이 쏠렸다.
국악과 재즈는 의외로 닮은 점이 많다. 특히 초기 재즈의 뉴올리언스 스타일이나 블루스, 스윙에서는 5음 음계(펜타토닉), 즉흥성, 콜 앤 리스폰스와 같은 구조가 두드러진다. 이는 전통 국악, 특히 민속악 계열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모던 재즈로 넘어오면서 화성 구조는 더 복잡해지고, 리듬 해석은 비직선적으로 변형되며 이 두 음악의 감각적 공통점은 점차 흐려졌다.
두 장르는 작곡 방식에서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재즈는 서양 화성학을 바탕으로 리하모니제이션과 즉흥 연주를 통해 음악을 확장해 나간다. 반면 국악은 화성악기 없이 선율과 장단의 결로 음악을 짜낸다. 하나는 코드를 중심으로, 다른 하나는 호흡과 흐름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셈이다.
보컬과 기악의 위상도 차이를 만든다. 국악은 소리꾼의 가창을 중심으로 기억되는 반면, 모던 재즈는 연주자의 즉흥적 기악 연주가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단순히 악기 구성의 차이만이 아니라, 음악을 구성하는 힘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차이는 장르 간 결합 가능성과 제한을 동시에 드러낸다. 국악의 보컬 중심 구조는 뮤지컬이나 오페라처럼 서사를 담는 무대 예술 형식과 결합할 때 더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마당놀이는 그 대표적인 예다. 사람의 목소리를 중심에 놓고 극의 흐름을 노래로 이끈다는 점에서 서양의 뮤지컬과도 닮아 있다.
최근에는 국악을 새롭게 해석하는 흐름도 많아졌다. 이희문과 재즈 밴드 프렐류드, 잠비나이 같은 뮤지션들은 국악의 미학을 유지하면서도 청취 방식에 변화를 제안한다. 이들은 장르의 융합보다는, 관습을 재배열하고 경계를 흐리는 방식으로 더 자연스러운 전환을 시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러한 흐름에 쉽게 자신을 투영하진 못했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국악보다는 서구 팝과 일본 음악,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한국 대중가요를 들으며 자랐다. 국악은 내게 언제나 약간은 거리감 있는 언어처럼 느껴졌다.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저절로 내 안에 스며든 음악은 아니었다.
더구나 종종 ‘한국인이라면 국악으로 정체성을 표현해야 한다’는 암묵적 기대 자체가 나에게는 정체성을 타자화하는 강요처럼 느껴졌다. 마치 진짜 ‘한국성’은 따로 존재하고, 나는 그 주변부에 있는 사람처럼. 이 지점에서 정체성은 자율적 표현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규정된 위치로 전락한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정체성을 단지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반복적 수행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 말한다. 즉, 정체성은 ‘무엇이다’라기보다는, ‘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나는 국악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반복적으로 요청되는 수행의 대상으로 마주해 왔다. 내가 되는 과정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일종의 실험이다.
이 점에서 들뢰즈(Gilles Deleuze)와 과타리(Félix Guattari)가 말하는 “되기 “라는 개념은 고정된 본질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체성 구획을 넘어서며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뿌리를 회귀적으로 증명하려는 서사가 아니라, 경계 위에서 새로운 말을 구성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국악이 낯설다. 그러나 그 낯섦을 탐색하는 일은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단순히 국악과 재즈라는 두 장르를 섞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어떤 목소리로 말하고 싶은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나는 그 경계 바깥에서 말하고 싶다.
내가 말하는 국악은, 전통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증표가 아니라, 그 뿌리 바깥에서 자라나는 새로운 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