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현 Mar 28. 2024

아부다비에서 온 편지(11)

파편에서 비롯된 사랑




<스테인드글라스>


늦은 오후

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높은 창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저녁 햇살이

내 앞에 눈부시다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나 아직 알 수 없으나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조각난 유리로 만들어진 까닭은

이제 알겠다

내가 산산조각 난 까닭도

이제 알겠다


- 정호승, 《스테인드글라스》, 전문




곧 다가올 부활절. 시 하나가 떠올랐다.

로마의 작은 성당을 거닐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는 빛의 아름다움을 넋 놓고 보았던 때... 바르셀로나 몬세라트 수도원에서도... 목이 부러져라 쿠폴라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면 성당 내부로 들어오는 색색의 빛이 마치 내 가슴을 비추는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고 있을 때는...

산산조각 난 유리는 굴절과 산란을 통해 아름다운 빛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내 마음 가득 깊은 울림을 주었다.

로마 여행 중 '빛'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남은 이유이기도 하다.

바르셀로나. 몬세라트 수도원에서...


부활절에 즈음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깊이 묵상해 본다.

산산조각 난 예수의 몸이 인류를 구원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떠올린다. 조각난, 상처 난, 죽임을 당한 그 몸은 아프도록 깨어진 유리조각 같다.

더 큰 가치를 위하여 한 사람의 몸은 조각이 나고 그로 인해 세상은 빛이라는 이름의 생명을 선물로 얻었다.

정호승 님의 시에서 ‘내가 산산조각 난 까닭’을 알겠다 함은 그야말로 큰 영성의 획득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산산조각 형상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예수의 죽음, 부활, 그 신성의 표상이 아닐까?

고통과 마주하며 산산이 깨어지는 자아를 마주할 용기가 내 안에 있는가? 까맣게 타들어가는 내면의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생각날 것 같다. 고통이라는 검정 베일을 걷어내면 무지갯빛 생명의 조각들이 빛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 순간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오늘, 예수님 발아래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마음이 되어본다.

깨어진 옥합의 조각들 사이로 향기가 피어오른다. 영혼을 가득 담은 사랑의 향기. 예수의 부활을 미리 기뻐하는 환희의 향기가.


매거진의 이전글 아부다비에서 온 편지(1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