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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Nov 13. 2024

조지아 여행기(3)

달팽이와 바이오필리아

 ‘녹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녹지를 좋아하고 있다.

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시골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내었던 나의 기억 속에는 초록에 대한 기억이 몇 장면 남아있다. 사진을 찍어놓은 듯한 장면들 말이다.

나무 타기를 좋아했다. 은행나무를 털어 냄새나는 은행을 왕창 따다 집마당을 은행 냄새로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포구나무 위에 올라가 멀리 보리밭을 바라보기도 했다. 동네 친구들과 모여 푸른 보리밭 사이를 뛰어다니며 놀기도 했다. 냇가에서 돌을 주워 모아 공기놀이를 하고 들에 핀 꽃으로 팔찌를 만들며 놀았던...

나는 필연적으로 초록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구나. 지금에서야 생각해 본다.


그런 내가 자라서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최근에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새삼 다시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또 두 딸들에게 자연으로, 야생의 삶으로 한걸음 더 걸어 들어가자고 이야기하며 지낸다.

지난 조지아 여행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며칠 전 아이들은 조지아 여행의 느낌을 그림으로 남겼다. 카즈벡 산과 고양이를 그리던 둘째 은유. 은서는 석류를 그렸다.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렘은 온데간데없고 우리 기억에는 설산과 고양이. 그리고 조지아의 햇빛을 잔뜩 머금은 석류가 남았다.

은서 기억 속 조지아. 석류.


누군가 내게 여행의 좋은 점이 무어냐 물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여행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건 '느림', 그리고 '환기'가 아닐까하고 대답했다.  여행지에서 만큼은  천천히 하루를 보내고 또 일상과는 다른 낯선 장소에서 낯선 풍경들을 보며 조금은 낯선 마음상태가 되어보는 것. 내가 경험한 여행은 그랬다. 내게 여행은 감정의 환기가 되는 순간이 아닐까 한다.


쿠타이시에서 카즈베기로 차로 종일 이동한 날. 우리들이 타고 있던 차에는 펑크가 났다. 어른들은 사고 처리에 여념이 없었으나 아이들은 달랐다. 비바람이 치는 추운 날. 2시간도 넘게 걸린다는 차량수리공들을 무작정 기다릴 순 없었다. 차에서 놀다 그림 그리다 간식도 먹던 아이들은 차를 박차고 나왔다. 비가 내리는 위험한 고속도로라 나도 따라내려 갓길에서 아이들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우산은 필요 없다며 비를 맞던 아이들. 도로옆 흙에서 커다란 달팽이를 발견했다. 둘째 은유는 환호성을 질렀지만 손에 달팽이를 올리진 못했다. 언니가 달팽이와 노는 모습을 지켜볼 뿐. 너무 귀엽다며 발을 콩콩 구르던 은유는 용기를 내 달팽이를 만져보았다. “미끄럽고 간지러워 엄마.” 까르르 웃던 아이들은 달팽이를 집에 데려가고 싶어 했다.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아이들은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는 언니가 “달팽이를 가져가면? 가는 동안 몸이 마르면 어떡해?” 그러자 은유도 “ 맞아. 여기가 달팽이 집일 텐데. 데리고 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아.”하며 달팽이 납치(?)를 포기하고는 흩뿌리는 비를 맞으며 까르르 다시 웃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간지럽히던 달팽이의 물렁한 몸통, 그 촉감으로 카즈베기 가는 길을 기억할 아이들.

나는 그 순간을 습도와 온도, 향기로 기억한다. 비가 와서 촉촉해진 대지를 적시고 다시 뿜어져 나오는 그 습한 흙내음. 비가 내려 으슬으슬 춥기도 했던. 옅은 안개가 시야를 살짝 가렸던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던 도롯가.

길에서 만난 스승님. 달팽이 님.

인간이 자연을 마주할 때 수많은 감정에 휩싸이는 이유는 무얼까?

나는 에드워드 윌슨이 제안한 ‘바이오필리아 이론’에 마음을 보태어본다. 인간의 뇌가 수백만 년 동안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진화했기 때문이고, 그래서 인간은 시시때때로 그 자연 속에 머물고 싶어 하는, 연결되려 하는. 이른바 '녹색갈증'을 느낀다는 것이다.

사실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이론들을 펼치고는 있지만 신이 만든 이 거대한 자연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인간이 신을, 자연의 이치와 원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지극히 기만적인 것이며 측량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바이오필리아 이론이 우리를 자연으로 이끄는 이유라면 우리가 자연 속에서 '얻는 것'은 무얼까?

요즘은 어떤 단어 뒤에 세러피라는 용어를 많이도 붙인다. 그만큼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숲 속에서 피톤치드를 마시며 숲치유라는 것을 하기도 한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때로는 자연주의적 행동들의 저변에 쾌락주의가 깔려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치유의 이름을 가장한 쾌락(쾌감)의 만족은 일시적이며 피상적일 것이다.


지구 생태계가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자연의 품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찾은 조지아 또한 그러했다. 도로를 달리며 본 평원들. 그위에서 풀을 뜯던 소와 양들의 모습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지만 산을 더 높이 오를수록 잘린 산의 단면들이 많이도 보였다. 기계와 장비들이 오르내리는 산의 모습은 폭력적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시간과 돈을 들여 야생의 장소를 인위의 장소로 바꾼다. 관광객들은 시간과 돈을 들여 그곳에 온다. 산과 숲이 있던 곳에는 건물이 들어서고 동물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숲이 전체 영토의 40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조지아도 이러한데. 세계 곳곳 다른 도시들은 어떠할까?


건물 속에 소와 돼지를 가두고 키운다. 먹기 위해서. 풀을 먹던 소들은 항생제 사료를 먹고, 사람은 항생제 소를 먹는다. 몸에 좋은 것을 먹었다고 하는데 더 아픈 사람들. 왜 그럴까?

자연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비가 내려 풀이 자라고 숲이 되고 다시 낙엽이 되어 자연 퇴비가 되고 그렇게 비옥해진 땅은 좋은 작물들을 낸다. 시간을 들여 생을 사는 풀과 나무들. 그리고 더 오래 살게 된 인간동물들. 모름지기 생명이라는 것은 시간을 들여 자라야 할 것인데... '빠르게 더 빠르게'를 외치는 세상의 흐름에 음식도 생활도 다 패스트라이프가 되었다.


조지아 여행이 좋았냐는 질문들에 속시원히 좋았다는 대답을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나무들이 사라지고 많은 동물들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의 바이오필리아는 어떻게 될까? 기후위기 앞에 우리들이 잃게 되는 것은 자연만이 아닐 것이다.

'자연경험'의 멸종(손실).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인간이 만든 기계와 건물에 갇힌 굳은 사고를 하게 될 것이다. 생명감수성이라는 단어는 아마 '멸종'될 것이다.

최근 들어 전에 없던 ‘신경건축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에게 필요한 건 다시 자연과의 재연결일 텐데 그것을 사무실이나 집을 지을 때 정원을 만드는 등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마음의 이완, 쉼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온전한 쉼으로 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일 테다.


원래 하나인 자연과 나.

어린 시절 초록 세상에서 살던 한 아이는 때때로 녹색갈증을 느낀다. 아부다비 사막에서, 이 메마른 땅에서 습기 머금은 흙내음을 그리워하며...  또 조지아에서의 달팽이. 그 느림의 미학을 마음에 새긴다. 나도, 달팽이도, 카즈베기 설산도 그저 신이 만든 하나의 생명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하며 자연과의 연결은 개개인이 겪는 일인칭 경험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게 자연은 과학 지식이기 전에 유년기의 초록. 큰 포구나무 위에 앉아 맞던, 마치 나와 한 몸 같던 그 바람. 자연은 연결이고 하나이다. 자연과 인간은 본래 하나이고 하나였던 것은 결코 둘로 나눌 수 없다. 바이오필리아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느리게 더 느리게. 자연의 속도대로. 자연이 앞장서면 그 뒤에서 걸음을 맞추어 걸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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