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양식, 마음의 양식
카즈베기에서 지내는 동안 무엇을 먹었을까?
아침이면 일어나 따뜻한 차를 마신다. 차 마실 물을 데우는 일은 차갑고 건조한 공기를 데우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여름 한국에서 보이차를 사 오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요즘 꿈에서도 보이차를 마시니 말이다. 다행히 런던에서 사 온 블랙티가 조금 남아있었고, 유황마늘죽염이 있어서 매일아침 그 두 가지를 번갈아가며 마셨다.
유황마늘죽염은 반스푼 정도 물에 타서 먹으면 체온도 올라가고 면역 기능이나 호흡기 질환에도 참 좋다.
나는 보통 오전에는 차를 마시고 요가 수련을 한다. 그리고 오전 11시 이후가 되어야 식사를 한다. 카즈베기에 있는 동안도 차를 마시는 루틴과 식사 시간을 지킬 수 있었다. 아이들이 늦잠을 자주는 덕분에 말이다.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는 아이들. 미리 사둔 채소들을 볶고, 통밀빵과 쇼티를 꺼내어 놓는다. 조지아 전통 빵인 쇼티는 화덕에 구운 빵인데 커다란 쇼티 하나에 2라리(한화 천 원 정도)이다. 쫄깃하고 고소하며 약간은 짭짤한 쇼티를 하나 사서 두고두고 뜯어먹었다.
전날, 고속도로를 달리며 밀가루 음식으로 배를 채워서 인지 신선한 과일과 야채가 먹고 싶었다. 스테판츠민다 마을에 와서 보니 집집마다 사과나무, 감나무, 포도나무 등 유실수를 집 안에 두고 키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과일들이 자라기에 좋은 기후여서인지 그 값이 너무 저렴해서 머무는 동안 실컷 먹자 싶었다.
늘 그렇듯 토마토는 필수인 우리 집. 토마토와 양파, 마늘, 당근, 감자 등을 구워서 아침식사로 먹었다. 예전에 여행을 다닐 때에는 고형 카레를 들고 다니며 그곳의 채소들을 이용해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먹기도 했지만 가끔은 그냥 구운 채소들이 맛있기도 하다. 아침 겸 점심은 사 온 채소, 과일들과 빵으로 먹었다. 어느 날은 외식하러 나가서 조지아 전통 음식을 먹기도 했다. 숙소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의 한 음식점. 조지아 전통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에서 먹고 싶은 것 몇 가지를 시켰다. 힌칼리(khinkali)는 우리나라의 만두와 비슷한 음식인데 속에 고기가 든 것도 있지만 아이들은 치즈만 든 힌칼리를 먹었다. 전통빵 쇼티도 그렇지만 힌칼리의 반죽이 참 쫄깃했다. 내가 맛있게 먹었던 음식은 토마토, 오이 샐러드이다. 조지아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별다른 드레싱 없이 레몬 소스 정도만 뿌려 먹는 샐러드는 토마토와 오이를 크게 썰어 그 위에 호두 가루를 뿌려서 즐긴다. 채소값이 싸서인지 큰 그릇에 푸짐하게도 나온 샐러드가 참 맛있었다.
근처 조그만 마트에 가서 토마토와 당근, 오이 등을 다음 날 먹을 양만큼 몇 개만 사는 재미도 있었다. 당근을 두 개 샀는데 1라리도 채 하지 않았다.
한국의 로컬 식재료 판매장들이 떠올랐다. 세계 곳곳에 그 지역에서 재배되는 농산물을 바로바로 구입하는 매장이 더 많이 생겨나면 좋겠다 싶었다. 지역 농산물을 차로 이동시켜 그 값이 더 매겨지는 일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유통방식일 것이다.
밥을 볶아서 먹는 날에는 밥의 양을 넉넉히 해서 고양이들과 나누어 먹었다. 엄마 고양이는 밥을 보고는 아기고양이들을 데리러 갔다. 혼자 먹지 않고. 마치 엄마들이 “얘들아 밥 먹자.”하고 부르는 것만 같았다.
카즈베기에 올라오기 전 한 마트에 들러 와인 한 병을 사 왔다. 조지아는 와인을 제일 처음 만들기 시작한 나라라고 한다. 평소에는 드라이한 와인을 즐겨 마시지만 이날은 세미스위트와인을 샀다. 와인의 주산지라 그런지 와인 가격은 저렴했다. 마음이 가는 와인을 한병 골랐다. 두고두고 3박 4일을 식사와 곁들였다. 적당한 당도의 와인. 입속에 감기는 느낌과 향이 일품이었다.
조지아는 포도 재배에 이상적인 기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도롯가를 지나다 약간은 시들한 포도 두 송이를 사서 씻어서 껍질째 먹기도 했다. 와인의 주재료인 포도가 많이 재배되기도 하지만 보통은 무농약, 유기농으로 재배하기 때문에 껍질째 먹을 수 있고 덤으로 저렴하기까지 하니 이보다 좋을 수가.
조지아 와인은 전통 기법으로 양조, 숙성되는데 선사 유적지에서 발견된 토기의 이름을 딴 '크베브리' 오래전 발견된 그 토기 속에 발효된 포도씨가 8천 년 전부터 사용한 크베브리 토기의 역사를 말해준다고 한다.
좋은 기후 덕분에 다양한 품종의 포도를 재배할 수 있다고 한다. 사페라비, 르카치텔리 등의 와인을 몇 병 사 오기도 했다.
길을 가다 도롯가에서 과일을 파는 할머니를 만났다. 포도도 먹고 싶었지만 석류가 먹고 싶었다. 아부다비에서는 비싸서 사 먹지도 못했던 석류 두 개를 샀다. 마지막 숙소인 트빌리시에서 석류를 까다가 인도 오로빌의 후안이 떠올랐다. 나에게 석류 잘 까는 법을 가르쳐준 후안. 배우면 뭘 하나. 나는 석류를 까다 벽지에 석류물을 다 튀기고 말았다. 누군가 내 뒤에서 쯧쯧하며 고개를 젓는다. 내가 그렇지 뭐.
조지아의 광천수가 유명하다고 해서 보르조미 광천수도 한 병 사 먹었다. 광천수의 맛은 음. 뭔가 생수와는 다른 맛이기도 하지만 향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조지아 인들은 와인과 광천수가 자신들의 건강 유지 비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날은 스테판츠민다 마을 아래를 걷다가 낯익은 이름의 카페로 이끌리듯 들어갔다. 왠지 익숙하다 했더니 예전에 책에서 본 그 카페였다. 카페이름은 ‘Cafe 5047’.
입구에 들어서니 사진 하나가 걸려있었다. 설산 꼭대기에서 여러 명이서 찍은 사진. 카즈벡 산이었다. 카즈벡 산은 높이 해발 5,047미터이다. 카페 사장님은 저길 다녀온 거겠지? 카즈벡 산 아래에 카즈벡의 기운을 품은 카페.
그곳에서 아이들은 감자요리를 먹고 나는 따뜻한 티 한잔을 시켰다. 가게 곳곳 걸려있는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오래되어 보이는 편안한 그림들. 때로는 누가 그린지도 모르는 이름 없는 그림들이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
가게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설산, 그 아래 길에는 개들이 거닐고 있었다. 쿠타이시에서 카즈베기로 와서도, 그리고 트빌리시, 또 공항에서도. 이곳 조지아는 동물들을 방목하여 자유롭게 두고 있었다. 사람이 동물의 보금자리인 자연을 드나들듯 동물들, 특히 개와 고양이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공간을 드나들었다. 차로 달리며 보이는 평원에는 말과 소와 양들이 마음껏 풀을 뜯고 있었다. 우리네 공장식 축산과 대비되는 장면이다 싶었다. 몸을 움직여 스스로 먹이를 찾는 자유는 어느 동물에게나 주어져야 할 것인데... 하며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어떤 이는 조지아는 커피가 유명하냐 했지만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나는 그저 편안한 집밥을 먹고, 그곳에서 재배되는 과일과 채소로 끼니를 해결하고 가끔은 와인과 쇼티를 먹으며 지냈다.
기억에 남는 것은 토마토, 오이샐러드! 그 위의 호두 토핑. 그리고 가게 주인이 내어주는 따뜻한 색감의 양초. 테이블에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자 주인은 빨강 초를 가져다주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마들로바’(Madloba:감사합니다)하며 조지아 언어로 감사를 표했다.
갓 나온 음식 보다 초에 시선을 두게 되었다. 차가운 샐러드. 그 곁의 따뜻한 불빛. 몸의 양식을 내어주며 마음도 함께 채우라는 주인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냉장고에 넣어둔 조금 시든 석류를 꺼내야겠다.
조지아의 석류. 오로빌의 후안을 떠올리며 오늘은 석류를 잘 까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