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품은 카즈베기
밤늦게 조지아 쿠타이시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열악한 숙소에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카즈베기로 향했다.
차로 5~6시간은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고산지대. 높디높은 곳을 차로 오를 수 있음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달리며 보이는 드넓은 평원. 그위에서 풀을 뜯는 소와 말, 양 떼들을 보았다. 아부다비 사막을 떠올렸다. 뜨겁고 메마른 나라에 펼쳐진 사막은 풀이나 나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기후가 다른 이곳 조지아에서 만난 초록의 풀들 그 위의 동물들을 보니 건조하던 마음이 촉촉해지며 일렁였다. 여기서는 숨 좀 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차로 달리다 구부러진 길을 만났다. 그런데 차들이 다 멈춰 서있다. 풀을 뜯던 양 떼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200마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양 떼들의 귀갓길. 동물들의 러시아워였다. 차들은 일제히 멈춰 양 떼들이 모두 지나가도록 기다려주었다. 아이들은 창문을 내리고 메에~메에~ 양들을 향해 소리쳤다. 동물원이 아닌 초원옆 도롯가에서 만난 동물들... 그 광경을 본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가 동물들의 보금자리를 지나는 순간이었다.
달리고 달려서 도착한 카즈베기. 스테판츠민다 마을. 카즈베기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을 지켜주는 카즈벡산이 있기도 한 높디높은 지대.
카즈벡산은 해발 5,047미터이다. 캅카스 산맥 일곱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산 아랫마을 스테판츠민다에서 3일 밤을 보내기로 했다.
오랜 시간을 달려 도착한 스테판츠민다 입구는 흡사 한국의 설악산 입구 같았다. 나의 20대 시절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그 설악산의 입구. 반달가슴곰 동상이 늘 반겨주던 곳. 높은 산 아래에 있어서 그랬을까? 문득 오랜 전 산과 친구로 지내던 그때가 떠올랐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잠을 청했다. 여행 이틀째 날인데 이동, 짐 풀기, 잠자기의 연속이라니… 머나먼 카즈베기로 들어가는 데에 하루를 다 쓴 셈이었다.
통나무 숙소는 원래도 추웠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더 추워졌다. 산아래 마을이긴 해도 해발 1,100미터의 고산 지대 숙소이다 보니 추운 건 당연한 게 아닌가... 숙소 안 난방기기는 라디에이터 두 대가 전부였다. 새벽 네시쯤 되어 몸이 으슬으슬해져 잠이 깼다. 조용한 새벽에 누구라도 깰까 조심조심 라디에이터 옆으로 갔다. 길이는 1미터쯤 폭은 한 15센티쯤 되는 라디에이터 위에 담요를 깔고 그 위에 모로 누웠다. '오늘도 잠자기는 걸렀네.' 하면서 기계의 온기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몇 시간쯤 잤을까? 암막커튼을 걷자 쏟아지는 햇빛과 함께 빛나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우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창문 너머 보이는 높디높은 산들, 그 위에 내려앉은 새하얀 눈, 그리고 숙소 바로 앞에는 노랗게 물든 나무들이 보였다. 가을과 겨울, 두 계절이 동시에 내려앉은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언제나처럼 포트에 물을 올려 차 마실 준비를 해두고 숙소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입에선 또다시 우와 하는 소리가 나왔다.
코를 스치는 차가운 칼바람에 화들짝 놀란 것이다. 후다닥 숙소로 들어왔다. 이런 추위 또한 얼마만인가. 뜨거운 아부다비에 1년도 넘게 살았으니 추위란 먼 나라 이야기라 여겼었다.
차를 마시려 앉아 숙소 안 길게 들어오는 햇볕을 바라보며 새벽의 추위는 조금씩 물러나고 있구나 했다. 아이들이 꿈틀대며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앉았다. 그러다 우리들의 눈에 들어온 건 고양이 한 마리. 작은 고양이가 바깥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말릴 새도 없이 고양이 덕후 어린이 둘은 내복만 입은 채 뛰어나가버렸다. '얼마나 추운지 모르는 녀석들...' 하며 얼른 외투를 챙겨주었다. 아이들은 금세 고양이와 친해져서 밥도 주고 물도 주며 같이 놀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양이 세 마리가 더 왔다. 아기고양이들이었다. 처음 왔던 엄마고양이에 이어 아기고양이들도 숙소 앞에서 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다 안아주다 하며 카즈베기 첫굿모닝을 했다. 엄마 고양이는 둘째 은유의 어깨에도 올라가고 장난도 쳤다. 장난기 넘치는 아이들끼리의 만남. 춥지도 않나? 아이들에게 추위는 별스럽지 않아 보였다.
아침 식사를 하고 산에 오를 준비를 했다. 어른들끼리 여행이었으면 당연히 카즈베기의 주타 트레킹 코스를 걸어갔겠지만 아이들과 동행하는 설산 등반은 차로 이동하는 게 백번 낫다. 2,200미터까지 차로 올랐다. 그리고는 목표지점인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까지는 조금 걸었다. 그런데 구름이 우리 눈앞을 다 가려버렸다. 높이 올라갈수록 코와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몸을 웅크리고 걷는데 강아지 한 마리를 만났다. 검정, 갈색이 섞인 강아지. 눈빛이 초롱초롱한 강아지가 우리 뒤를 졸졸 따라왔다. 나는 시선을 낮춰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강아지의 눈빛이 다른 곳을 향하지 않고 내 눈만 빤히 바라보는 게 아닌가. 나는 자세를 더 낮추어 앉아 내 겨드랑이 사이에 강아지를 들어오게 했다. 움츠렸던 내 팔과 다리가 따스해져 왔다. ‘얼른 숙소로 내려가야지.’ 했던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너도 같이 우리 숙소로 갈래?” 하며 강아지에게 묻기도 했다. '처음 본 사이인데 이렇게 친근하게 느껴지다니. 말도 안 돼.' 하며 이런 친밀함은 대체 무얼까 했다. 그 강아지의 눈빛이 아직도 떠오른다. 지금도 추운 카즈베기를 잘 지키고 있겠지?
산을 오르는 길에 시야를 가린 구름을 만난 덕에 눈을 낮춰 강아지를 바라볼 수 있었다. 설산을 선명히 바라보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강아지가 달래주었다. 움츠린 몸은 강아지를 껴안으며 온기로 가득 찼다. 친밀감을 다른 말로 ‘온기’라 부르면 어떨까 생각했다. 눈산 풍경은 내일 또 볼 수 있을 거야 하며 따뜻해진 마음을 안고 숙소로 내려갔다. 오늘 밤에는 라디에이터에 올라가는 대신 옷을 두껍게 껴입고 자야지. 푹 자고 나면 내일은 해가 쨍쨍 떠있을 거야. 내일은 반짝이는 해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양말을 껴신은채 발가락을 까딱이며 오늘 만난 강아지와 숙소 앞 고양이를 떠올렸다. 추운 카즈베기의 따뜻한 하루가 저물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