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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Feb 03. 2021

새벽송

크리스마스 뒷날, 언니가 말했다. ‘새벽 송을 도느라 피곤했어.’ 갑자기 낯선 단어가 내 귀로 들어왔다. 새벽 송, 그게 뭐지? 우연히 엿들은 언니의 그 말은 내게 뭔가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1970년대 초, 어느 겨울에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왔다. 성탄 자정미사가 끝나고 육중한 성당 문이 닫혔다. 열댓 명의 청소년들은 성당을 빠져나와 시커먼 어둠 속을 헤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부님 사택으로 모여들었다. 20대의 오빠, 언니부터 가장 나이 어린 나와 내 친구들까지 그날 새벽 송을 돌 사람들이었다. 자정이 넘어서 우리는 손전등을 든 조장을 따라나섰다. 나는 빨간 내복과 나일론 스웨터, 그리고 언니로부터 물려받은 파란 점퍼로 완전 무장을 했다. 


  처음 집은 당연히 성당 바로 옆인 우리 집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묵직한 대문이 막아서고 있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다 끝날 즈음 어머니가 나오신다. 헤어지는 인사는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이다. 서로 반가운 웃음을 나눈 덕에 모두 신이 난다. 

  다음은 신작로 건너 큰 길가에 있는 젬마네 집. 깜깜한 점방 안에 잠들어있는 과자들이 유리창에 비친다. 콜라 상자도 보인다. 다시 고요한 밤을 불렀다. 그리고 또 다음은 집 앞 돌담에 늘 앉아 있는 요아킴네...


  점점 집들이 듬성듬성해지면서 우리는 바닷가 쪽에 나 있는 외딴집으로 향한다. 그쪽으로 가려면 두레박을 드리워 물 긷는 샘물을 돌아가야 한다. 대낮에 물을 길러 가더라도 우물 저 깊숙한 아래쪽은 푸른 빛이 살짝 도는 게 아득하고 무서웠던 곳이다. 나는 혹시나 우물 귀신이 나오지는 않을까, 오빠들 옆에 바짝 붙어서서 걸으며 더 크게 성가를 따라 부른다. 


  우물을 지나면 검은 바위투성이인 바닷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바위를 딛고 서면 얼음같이 차가운 겨울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기 시작한다. 서로 질세라 조장 따라 캐럴을 부르기 시작했다. 징글벨 징글벨.. 흰 눈 사이로.. 빠르게 성가를 돌리기도 한다. 아기 잘도 잔다 아~. 마을은 없는데 우리들의 노랫소리는 더 커져간다. 여러 개의 손전등이 이쪽저쪽으로 흔들거리면 우리의 발걸음도 따라 흔들거린다. 


  작은 오두막, 외딴집에 도착했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탄생하심을 알리는.. 글로오리아~ 글로오오 오리아~’ 노래 한 곡이 끝나가는데 인기척이 없다. 한 곡을 더 불러야 하나?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에 창호지를 바른 방문 틀 가운데에 사람의 그림자가 생겨났다. 방문이 삐이걱하고 열렸다. 슬로우비디오가 연상될 만큼, 느리게 댓돌을 딛고 내려서신 분은 허리가 반 굽은 할머니셨다. 옆 친구 말이 혼자 사신단다. 느린 걸음으로 나오셔서 배시시 웃으시며 인사를 하신다. 쨍그렁! 이런 분을 도와야 할 것 같은데 여지없이 몇 푼이라도 넣어 주신다. 새벽 송 노래 값은 어떤 집은 몇 십원의 동전부터 어떤 집은 500원짜리 지폐까지 성의껏 낸다. 그렇게 모인 돈은 더 가난한 사람의 집으로 향한다. 


  드디어 다 끝났다. 얼굴이 얼얼하다. 새벽 3~4시경, 비교적 넓은 마루와 마당이 있는 큰고모 집에 들어섰다. 둥그런 전구 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사방으로 환하게 빛을 내며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대청마루를 건너 큰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아들이 신부님인 큰고모님은 매해 마다 이렇게 방을 내어주셨나 보다.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방금 있었던 새벽 송 얘기며 크리스마스이브 공연 얘기들을 했다. 나는 꾸벅꾸벅 졸다가 변소에 가고 싶어 일어섰다. 환하게 불 밝혀 있는 데다가 신식 화장실이라 무섭지 않았다. 볼일 보고 돌아 나오는데 차가운 바람이 발목 주변을 소리 없이 휘돌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잠시 내 눈은 쪽마루 아래에 있는 고무신들에 머문다. 아까 나올 때 아무 신발이나 신고 나왔기 때문이다. 고무신에는 내 이름표가 있다. 주인 만큼 입을 벌리고 말을 한다. 내 고무신 이름은 ‘ㅈ’이다. 잃어버릴까 봐 부지깽이를 불에 달궈 표시했는데 빼뚤빼뚤해도 내 눈엔 ‘ㅈ’이다. 그렇게 읽을 수 있는 것은 나뿐이지만. 고무신 안에는 각자 이름표가 새겨져 있다. 보통은 네모난 부지깽이를 나타내는 ‘ㅁ’자다. 그래도 표식 위치나 문신의 크기며 고무신의 때깔로 자기 것을 찾을 수 있다. 내 눈에 보이는 고무신들은 다정하게 웅크려있다. 동그란 알전구의 빛만으론 추운지, 고무신들도 마당 한쪽에 옹색하게 모여들어서 자기들끼리 오들오들 얘기하는 거 같다.


  점점 비지근한(살짝 느끼하면서도 맛있는) 냄새가 나면서 입안에 침이 고였다. 문이 열리더니 돼지고기 국수 한 그릇씩 배달되었다.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받아든 순간, 비곗덩어리인 작은 살점이 한두 개 떠 있다. 국물에는 기름 알갱이가 방울방울 헤엄을 친다. 얼굴을 디미니 비계 국물이 그렇게 향기로울 수 없다. 김치를 말아가며 모두 국물까지 다 비웠다. 


  찬바람 맞으며 새벽 송을 돌다가 함께 얻어먹는 국수 한 그릇, 거기엔 만족과 보람이 함께 있었다. 강조해서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였고 가난하고 고달파도 나눌 수 있어서 기뻤으며 그 순간이 행복하였다. 그것이 하늘나라가 너희에게 있다는 말씀 아니실까? 지금은 사라진 새벽송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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