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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Feb 03. 2021

동동 그리무 아줌마

아줌마는 하얗고 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하얀 크림이 가득 들어있는 통을 열었다. 비닐에 한 숟갈씩 퍼담아 필요한 만큼 원하는 사람에게 팔았다. 나는 언니 옆에서 아줌마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아줌마는 엷게 미소를 띨 뿐이었다. 아줌마는 장사를 제법 잘했는지 규칙적으로 신창 오일장에 나왔다. 


   언니는 초등학교 5학년, 나는 일곱 살이었다. 붙임성이 좋은 언니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웃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근대 삽써게, 막 따완마씨”(근대 사세요, 막 땄어요)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5원어치씩 근대를 사 갔다. 심지어 언니는 5학년 반 담임선생님께도 사정해서 팔았다. 언니는 이렇게 판 근대값을 고스란히 어머니께 갖다 드렸다.


 “우리 사라는 존샘이 참 좋아이!”(정이 많구나) 

어머니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으셨다. 그래서 언니는 늘 돈이 궁한 엄마를 돕기 위해 뒤뜰에 잔뜩 돋아난 근대를 따서, 소쿠리에 담아 들고 무작정 오일장으로 가곤 했다. 나는 언니를 쫓아다니며 오일장 구경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다 그 아줌마가 눈에 들어오게 됐다. 그녀는 시골 오일장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큰 키 덕에 어느 구석에 있어도 눈에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하얀 얼굴과 오똑한 콧날, 얇은 눈꺼풀의 깊고 그윽한 눈매를 가진 서울 사람이었다. 물건을 파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더군다나 무얼 사달라고 소리치는 적이 없었다.


 1960년대에는 동동 그리므(크림)를 팔던 때라서, 나는 아줌마의 하얀 피부를 보고, 다른 아줌마들도 예뻐지려고 크림을 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궁금해서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아줌마는 조용한데도 어떻게 장사를 잘할까?”

 “글쎄 말이야, 나는 근대 사달라고 소리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아는 분을 붙잡고 사정하면서 파는데......”


  그녀의 남편은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서울대를 나왔다. 우리는 그를 산 아저씨라 불렀다. 턱수염과 안경 쓴 얼굴이 트레이드마크였다. (그 당시엔 안경을 낀 사람이 별로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멀쑥하게 잘생긴 얼굴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아저씨는 봉사로 성당에서 발표하는 청소년들의 연극을 지도하기도 했다. 보통은 조용히 저수지에 머물며 글을 썼는지 마을에 자주 보이지는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아줌마는 이화여대를 나온 서울 사람인데 아저씨와 결혼하여 남편의 동네로 이사 온 거였다. 그들은 저수지 옆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인 의사가 풍광이 좋은 저수지를 구경하다 그 부부를 만났나 보았다. 영어로 대화를 하면서 며칠 사이에 친해졌다고 한다. 그 의사는 산 아저씨네의 가난한 살림에 보태라고 독일에서 무좀약을 부쳐주었나 보았다. 아줌마가 그것을 받아서 집 근처에서 팔다가 주변 오일장을 돌아다니게 된 거였다. 


  그 당시에 우리들은 고무신을 신었다. 값이 싸면서도 질기고 빨기도 쉬운 고무신이었기에 시골에서는 고무신을 신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떨어지지 않으면 한 켤레로 사시사철 신었는데, 고무신의 단점은 통풍이 안 되어 땀이 차거나 하면 무좀이 잘 생겼다. 게다가 무좀은 옮기기가 쉬웠고 그러다 보니 시골 사람들 누구에게나 무좀은 흔한 질병이 되었다. 그러기에 목청을 높이지 않아도 아줌마는 쉽사리 무좀약을 팔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엉뚱한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하여튼 언니의 몇십원이나 아줌마의 몇백원이나 한나절은 꼬박 장에서 품을 팔아야만 벌 수 있는 귀한 돈이었다. 언니도 용기 있는 행동이었고 무좀약을 팔았던 아줌마 또한 대단한 여성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남이 뭐라고 쑥덕이건 말건 오일장에 어김없이 나타나 조용히 자기 삶의 터전을 지켜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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