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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Aug 09. 2023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

꿈분석 모임, 꿈밀당 이야기2

  이번 꿈 분석 모임에선 아르테미스에 대해 읽었다. 아르테미스는 순결을 상징하는 여신이다. 아르테미스는 제우스에게 순결을 잃고 임신한 님프를 화살로 처단한다. 한편으론 냉혹한 그녀를 읽다보니 처녀림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처녀림, 누구도 들어선 적이 없는 태곳적 자연림, 그곳에 발을 딛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하면 더이상 태곳적 그 모습은 남아나질 않는다. 그러니 단호하게 지키는 것이 더 나은 거 아닐까? 어쩌면 아르테미스의 냉혹함은 그런 걸 나타내는 건지도 모른다.     


  꾸름의 제안에 따라 조용히 각자 자신의 신체를 의식하며 3분 명상을 하는 것으로, 꿈 분석에 들어갔다. 나의 꿈을 나누기로 했다.       

   

  나(나비): 내가 쫓기고 있어요. 독립군처럼. 어떤 지역인데 감시자가 있고 그를 피해 도망하는데, 성공했다고 여긴 순간 들킨 것 같아요. 수색이 좁혀들어오는데 하얀 고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대신 들켰어요. 그러자 여자가 마치 종이 인형처럼 갈라지며 불이 붙었죠. 그 여자의 몸이 폭탄 터지듯 터져서 옆에서 타고 있는 모닥불로 옮겨붙을까 내가 걱정했어요. 그런데 그냥 폭발을 않고 ‘안심하세요’ 하며 사그라져갔어요. 사실 그 전날 <마당이 있는 집>을 봐서 그것이 꿈에 반영된 게 아닐까 해요.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누군가 학교 꿈이 아니라 다행이네. 이제 학교는 졸업한 건가? 하는 소리가 먼저 울렸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꾼 꿈이 학교가 아니라서 기분이 좋다.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건가? 아직은 모른다. 나는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 때문이라고 여겼었다. 거기서 김태희가 초록색 고급 드레스를 입고 마당의 흙을 파는 장면이 나온다. 저런 옷을 입고 흙을 판다고? 부잣집은 참 희한하네 싶었다. 그게 인상에 남아 그저 꿈에 나타났으려니 생각했었다.

     

  꿈의 내가 몇 살 같아요? 지금 나이요. 감시자는 남자 같아요? 네, 남자였어요. 몇 명이에요? 몰라요. 한, 두 명? 많았던 것 같진 않아요. 어디서 쫓기고 있었어요? 기억에 없어요. 수풀 같은 데로 도망간 것 같은데......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어떻게 반으로 갈라졌어요? 정확히 반인지는 모르겠고, 종이 인형처럼 찢어졌다고 해야되나? 아무튼 혈액이든, 내장이든 지저분한 게 아무것도 없이 빛이 새어 나왔어요.     


  맨더: 독립군처럼 쫓기고 있다는 것은, 평소에 활동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서 쫓기듯 바쁘게 사는 것을 표현

        한 것은 아닐까요?

  나: 그래요? 나는 그저 드라마를 보고 꿈에 투사됐다고 생각했는데......

  쓰봉: 그럴 수 있어요. 영화 같은 게 반영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보통 꿈은 다층적이죠. 


  바람: 수풀 같은 곳이라는 말에서 아까 읽었던 아르테미스가 떠올랐어요. 만일 내 꿈이라면, 원시림 같은 어

        쩌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자기 원형을 찾아 헤매고 있음을 나타낸 것 아닐까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안심하세요’ 하는 것은, 또 다른 내가 헤매는 나에게 쫒기듯이 초조하게 찾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려는 게 아닐까요? 

  나: 제가 향심 기도를 하는데요. 명상하듯 그저 가만히 숨을 쉬면서 하느님을 만나려고 문을 열어놓는 기

     도를 말해요. 몇 개월 전부터 계속하고 있는데, 그런데 뭔가 벽이 있는 것처럼 막힌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거든요. 어쩌면 융이 말한 자기의 원형을 내가 어떤 표식으로 찾으려고 한다고 꿈이 말할 수도 있겠네요.     

  썬: 하얀 원피스의 여자는 천사처럼 네 기도가 잘 되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알려주는 존재가 아닐까요? 나

     도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는데. 남들은 하나님 체험을 하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서, 실망했었

     거든요. 왜 나만 못 느끼나? 하고. 나비님이 벽을 느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현

     실에서 기도하면서는 느낄 수 없었지만, 무의식은 그 기도가 나름 잘 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던 건 아

     닐까요?     


  바람: 근데...... 호흡하면서, 내가 이렇게 숨 쉬고 있구나. 내 심장이 뛰고, 숨이 배꼽까지 오르내리고 있는

        걸 느끼고 있는 그게 나구나. 그런 내가 그 자체로 존귀하다. 부처다. 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해요. 하

        느님을 만나려는 특별한 체험을 기대하는 것이 어쩌면 상(想)에 사로잡히는 것일 수 있어요.      

  썬: 불교는 내가 곧 부처다. 즉 일원론적 방법으로 내가 곧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는 좋은 방법 같

       아요. 그런데, 기독교는 이원론이지 않나요? 내가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 않나?

  피노: 기독교가 이원론이기는 하죠. 내가 하느님 자체가 될 수는 없죠.

  쓰봉: 구약에서는 나와 하느님은 완전히 분리된 존재이기는 해요.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님이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만나고, 나를 본 것은 곧 하느님을 뵌 것이라고 했으니 완전히 분리되어 내가 대상으로 존재하

       는 건 아니죠.

  나: 향심기도에서는 내 안에 하느님이 있다고 말해요. 우주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처럼. 그래서 숨을 쉬면

     서, 마음의 문을 열고 내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꽃무릇: 갑자기 왜 종교적으로 가? 그냥 일상적인 꿈으로 풀면, 안돼? 그냥 내 생각에 감시자가 있어. 나

       는 생각 속에서 이건 어떨까? 저건 어떡하지? 하고 걱정을 해. 나는 그것을 피해 도망하고 싶어. 하얀 옷 

       여자가 대신 사라져가며 안심하라고 알려주고 있어. 그러나 나는 안심하지 못하고 폭탄이 터지지는 않을

       까? 하는 또 다른 걱정을 해. 그런 내 상태를 표현해주는 거 아닐까?     


  쓰봉: 어쩌면 나비의 무의식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가 여성의 원형으로 자리 잡아서, 그렇게 되

       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진지하게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내 꿈을 풀었다. 정말 꿈 분석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힘은 대단하다.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저 드라마를 봤고, 내게 강렬했던 장면이 남아서, 꿈으로 나왔다고! 그런데 이들은 어쩌면 나의 심리 상태를 더 잘 꿰뚫고 있지 않나? 평소에 잔걱정이 많은 것도 나다. 그저 안심하고 사태를 바라다보기보다 미리 걱정을 당겨하는 경향이 있다. 꽃무릇에게 그 지적을 받고 보니, 닥치지 않는 일은 내려놔야겠다는 다짐을 새삼 하게 되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안심하세요’라고 했다. 내가 본래의 자기를 찾으려는 노력이든, 하느님을 만나려 애쓰는 기도이든 내 무의식이 나에게 일러주는 말이라 생각하자. 그냥 매일 기도를 하다 보면, 어떤 체험에 이르든 아니든 간에 나를 좀 더 알아가고 기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이 이런 것이지 않을까?


  하루가 지나고 쓰봉의 문자가 왔다. 흰색 고급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나의 그림자 같다는 투사다!


  [독립투사처럼 누군가의 감시를 피해 쫓기고 있는 나는, 어쩌면 나 자체보다는 대의명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의 모습 같기도 해요. 그냥 하얗고 고급진 드레스를 입고 예쁜 여자로 있어도 충분히 빛나는 존재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먼저 들켜준 게 아닐까 합니다. 수풀 속에서 그런 옷을 입고 있는 게 우리 상식에는 이상할지 모르지만, 수풀이든 궁전이든 그저 자기 모습 그대로 있는 게 그녀에겐 자연스러운 거죠. 마지막의 안심하세요는 마치 무의식이 ‘아, 네가 아직은 준비가 덜 됐구나. 그렇다면 이번은 내가 사라져줄게’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어쩌면 나는 투사의 옷을 입고 고군분투하며 사는 게 익숙하지만, 그런 삶의 태도로 인해 그냥 예쁜 인형처럼 살고 싶은 나의 욕구를, 무의식 저 깊이에 묻어둔 건 아닐까요?]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퇴직하고서도 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으로 바쁘게 휘돌며 산다. 월에는 그림과 중국어, 화에는 꿈 모임과 기타, 수요일엔 철학책 읽기 모임, 목요일엔 봉사활동을 간다. 금요일은 정기적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날이다. 그 외에도 요가, 향심 기도, 글쓰기 모임, 걷기가 있다. 

  이렇게 바쁜 이유는 나는 아직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지,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를! 그냥 존재 자체로 귀염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그런 것일까? 남녀 차별이 심하던 때에 나는 딸 다섯의 막내딸, 내 밑에 아들이 하나인 집안에서 자랐다. 그러니 나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고 나를 드러내기 위하여 착한 딸, 부지런한 동생으로 인식시키려고 부단히 애썼나 보다. 그런 나의 역할이 나를 증명해주었기에 거기에 길들여진 것인지, 가만히 있기가 두려운 것인가? 어쩌면 그래서 나의 그림자가 울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오늘은 골방에 들어앉아서 이런 나를 부여잡고 다독여 주어야겠다. 내 가슴을 톡톡 두드려주면서 그저 나에게 ‘괜찮아. 괜찮아. 하다가 힘들다고 느껴지면 그거부터 취소하면 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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