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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Oct 20. 2023

누가 등을 조금만 더 밀었더라면

  얼마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생님 얘기를 들었다. 진상인 학부모가 한 원인이라는 얘기였다. 그럴 수 있다. 예전에 나도 그렇게 힘들었으니까. 만일 학부모가 집요하게 나를 파고들었더라면 어땠을까?    

 

  당시 ㄱ학교 주변은 좀 슬럼화되어 있었다. 중학교를 중퇴한 아이가 초등생인 동생 앞에서 대낮에 버젓이 여학생과 성관계를 할 만큼 말이다. 학부모가 술 먹고 학교에 찾아오는 일은 다반사였고 교사들이 앉아있는 교무실에서 교사의 명품 백이 도난당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게다가 자기 조카를 팼다고 사냥 총을 들고 중학생을 죽인다고 쫓아온 삼촌을 달래느라 벌벌 떨던 일도 있던 막장 학교였다. 이렇게 학교 안의 아이들은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을 만큼 곪아 터지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 새로 부임한 교장은 교장을 빨리 다는 바람에, 2번이면 끝나는 교장 임기제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직 교육청 장학관으로 가거나 초빙 교장으로 가서 임기를 늘려야만 교장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려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야 했다. 그는 교사들을 쥐어짰다. 학생들의 출석율이 좋아야 하고 청소도 깨끗해야 하고 성적도 시 전체 평균보다 나아야 했다. 가정생활이 불안정한 애들이 많은 곳에서, 그 모든 걸 잘 해내라는 것은 담임들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모두가 죽을 맛이지만,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불평하지 않아 한숨만 쉬며 움직이던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2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다.      


  우리 반 아이가 3일간 결석했다. 그전에도 조퇴와 결석을 몇 번 해서, 혼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아이를 끌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셨단다. 그런 경우는 상고 처리를 해서 결석에서 제외한다. 그러려면 증빙 서류가 있어야 한다. 나는 부드럽게 아이에게 상고 결석 신청서를 주면서 부고장이나 주민등록상의 증빙 서류를 챙겨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이는 차일피일 미루며 서류를 가져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어머니께 전화해서 사정을 설명하고 서류를 보내라고 했다. 그런데도 한 달이 다 가도록 서류는 오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달마다 전체 학급의 통계를 내고 교장 결재를 받는 상황이라, 나는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교장이 나를 불렀다.     


  “김선생, 현조를 살살 다뤄야지. 너무 혼내지 않도록 해. 나한테 전화가 오잖아. 담임이 너무 힘들게 굴어서 학교 가기 싫다고!”     


  그러니까 현조 부모는 교장실로 전화를 해서 항의한다는 거였고, 교장은 자기에게 전화를 오는 일이 없도록 문제를 해결하라는 거였다. 교장의 얘기를 듣고 나는 굴욕감을 느꼈다. 내가 학생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교장으로부터 ‘잘못한다’ 평가를 받으니, 교사라는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생겼다.


  나는 우울했다. 교사라는 자존감은 내가 살아가는데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수업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행동 또한 바람직하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40대 초반이라 의욕이 충천했을 뿐 아니라 나름 유능한 교사라는 인정도 받았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나를 따르라’고 반 아이들을 이끌었다. 어쩌면 의욕이 너무나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고 아이들을 사랑했기에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나뿐 아니라 대체로 교사들은 학교생활을 모범적으로 했던 사람들이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잘못한다는 평가를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런 평가가 노골적으로 내게 내려진 것이다. 그런 굴욕적인 말도 참을 수 없었지만, 학부모가 교장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걸고넘어지는 것이 오래 갈 듯한 상황이라 더 문제였다. 뭐가 어찌 되든 간에 알아서 조용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오도 가도 못 하게 되었다.


  그러자 한없이 무력하고 답답했다. 누구에겐가 의지하고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동료 교사에게 잘못 말하면 말이 돌고 돌아서 다시 교장에게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학교생활을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해봐야 그들이 이해할 리도 만무했다. 고립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한없이 외로웠다. 교사들과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도 나는 의기소침해졌고 말이 없어졌다. 머릿속으로는 온통 그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학부모가 잘못하고 있는 건데, 그들이 해줘야 하는 일을 내가 요구하는 건데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한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


  그런 가운데서도 수업은 해야 하고 밀려드는 사무는 처리해야 한다. 화장실 갈 시간도 쪼개어 가며 닥치는 대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차를 몰고 퇴근할 때면 서러움이 밀려와서 갓길에 차를 세우고 혼자 울기도 했다. 한순간에 교사라는 자부심이 날아가고 무력하고 초라한 나를 보게 될 줄이야.


  며칠 동안 우울과 걱정 속을 헤매다 보니 한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동사무소로 갔다. 신분증을 보이며 아이의 결석 처리를 위해서 할머니의 거주지를 대고, 사망 확인을 하러 왔다고 했다. 사망했으면 해당 동사무소에서 사무 처리를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그제 서야 아이는 할머니 사망 때문에 결석한 것이 아니라 학교 오기가 싫어서 부모님과 함께 2박 3일 동안 놀러 다녔다고 실토했다.     


  다행히 그 문제는 아이와 부모가 함께 거짓말을 한 것이 폭로되면서 사태가 진정 국면을 맞았다. 나는 아이의 엄마를 불렀다. 아이를 감싸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거짓을 행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자꾸 보이면 아이는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고 진중하게 주의 주면서 따끔하게 말했다.     


  “어머니, 앞으로 성실하게 현조를 학교에 보내겠다고 자필로 쓰고 서명하세요.”  

   

  그 일은 그렇게 해서 잘 끝났다. 나는 비로소 교사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했고 예전의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때 문제 해결이 안 되고 그들이 내 등을 조금만 더 밀었더라면, 어땠을까?      


 첫 발령 때 아이들이 너무 좋아서 밥만 먹여주어도 아이들을 가르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교직에 모든 걸 걸었었다. 그랬기에 작은 흔들림에도 마음이 약해졌던 것일까? 그러니까 그들이 그때 내 등을 조금만 더 밀었더라면, 나도 세상을 버리는 그런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그랬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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