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언니의 입원이 10일 넘게 되자 병원에서는 퇴원을 권했다. 그러나 아직 홀로 살기엔 무리인 언니를 간병할 사람이 없었다. 언니는 혼자 다시 가게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럴 순 없다. 하지만, 함께 산다는 것은 나의 삶을 더러 포기해야 한다. 생존에 위협이 되어도 스스로 행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둘째 언니다. 둘째 언니를 다시 돌보게 되면 계속 함께 살아야 한다. 속된 말로 덤터기 쓸 수 있다. 그런 생각에서 나도 다른 언니들도 둘째 언니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째 언니가 불쌍하고 안타깝지만, 맡길 곳은 요양원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마침 알맞은 J 요양원에 자리가 났다.
요양원 입소 신청은 큰 언니가 맡았다. 병원의 퇴원도 큰 언니께 부탁했다. 대신 큰 언니가 그 일을 끝내고 나면 둘째 언니의 땅을 싸게 가져갈 수 있도록 돕겠다고 설득했기에 받아들여진 일이었다. 그러나 셋째 언니가 큰 언니 혼자서 퇴원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말에 두말 않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어차피 내려간 김에 둘째 언니의 돈을 정리하려고 했다. 언니를 퇴원시키고 간병비까지 처리하려면 언니의 정기예금을 해약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둘째 언니를 휠체어에 태워서 은행으로 모시고 가야 한다. 어디서 휠체어를 빌리지? 어떻게 은행까지 휠체어로 모시고 가야 하나? 하나, 하나가 내겐 큰 과제로 다가왔다.
셋째 언니와 병원에 도착했다. 둘째 언니는 훨씬 좋아져 있었다. 표정도 말씨도 움직임도! 간병인이 시원시원하게 일 처리를 해주어서 ‘아, 그동안 언니가 잘 지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병원에서 휠체어를 빌려 환자복을 입힌 채로 간병인과 함께 은행으로 갔다. 택시에 언니를 태우는 일도 힘들었고 게다가 휠체어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트렁크에 실어야 했는데 간병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못할 일이었다.
은행에서 정기예금을 찾고 앞날을 대비해 체크카드와 교통복지 카드까지 만드느라 시간이 오래 흘렀다. 병원비하고 남는 돈은 셋째 언니 이름으로 저금하고 둘째 언니가 필요한 모든 돈을 셋째 언니가 지출하도록 했다. 대신 나는 둘째 언니의 생활 전반에 필요한 것들을 선택하고 처리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와 셋째 언니가 갈비탕을 먹을 동안, 둘째 언니는 좋아하는 우동을 선택했다. 그동안 둘째 언니가 갈 곳이 애매해서 내가 헤매던 걸 다 들었던 터라 요양원으로 가는 것도 그냥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병원 로비에서 요양원 차를 기다렸다.
8월 14일 오후 2시, 드디어 J 요양원 차가 왔다. 우리는 둘째 언니가 입을 옷가지와 신발, 약 등을 챙겨서 함께 차에 올랐다. J 요양원 사람들은 친절했고 체계적이었다. 간호팀과 물리치료 팀, 간병인 팀으로 나뉘어 서로 면담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질문도 하고 자신들의 하는 업무도 팀별로 설명해주었다. 마침내 수속할 시간이 되었다. 행정팀에서 서류 접수를 하는데 내가 확인하고 서약하고 서명해야 할 서류들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가 내야 할 7가지의 서류도 단계별로 체크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쩌랴! 한 개가 빠져있었다. 큰 언니께 전화했다. 언니는 빠진 서류가 없다고 했으나 서로 맞춰보는 과정에서 ‘건강진단서가 없음’이 확인됐다. (우리가 제주에 도착하자, 큰 언니는 형부 건강문제로 서울 간다면서, 서류만 넘겨주고 빠져버렸다.)
요양원 행정실장이 말했다.
“더 이상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건강검진이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랬다. 나머지 사람들에게 무슨 병을 감염시킬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들여보내겠는가?
시간은 오후 4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건강검진을 하러 요양원에서 추천하는 병원으로 서둘러 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때가 또 휴가철인지라, 앞으로 6일 후에나 그 결과를 받을 수 있단다.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임시거처로 사는, 셋째 언니의 집엔 에어컨이 없다. 이 더운 여름에 열사병 환자를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게다가 둘째 언니는 휠체어에 앉아서 이동해야 하는데 언니 집 계단은 어떻게 올라가지? 할 수 없다. 호텔로 가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조카들에게 연락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빨리 비싸지 않은 호텔을 구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도 핸드폰을 켜서 마땅한 호텔을 찾기 시작했다. 역시 젊은이들의 손이 빨랐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호텔을 알리고 우리가 서로 말을 나누고 결정해서 다시 알리는 동안 호텔은 빨리도 동이 났다. 8월 15일이 역시 대목인 모양이다. 3개의 호텔을 놓치고 조카에게 빨리 아무 호텔이나 비싸지 않은 것으로 구해달라고 했다.
서울서 내려오는 비행기표를 각자 돈으로 사고 내려왔지만, 호텔비까지 감당할 생각은 아니었다. 결국, 그것은 둘째 언니 돈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러니까, 무조건 싸야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공항 근처 후미진 곳에 있는 호텔도 하루당 10만원이 넘었다. 마지막 선택지였다. 우리는 그곳으로 갔다. 감사하게도 요양원에서 움직이기 쉬운 휠체어를 빌려주어 둘째 언니를 태우고 다니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녁은 삼각김밥에다 구운 달걀과 우유를 선택했다. 우리는 호텔의 작은 탁자에다 김밥을 부려놓고 둘째 언니는 휠체어에 앉히고 한 사람은 침대 모서리에 앉고 다른 사람은 의자에 앉았다.
“큰 언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내일 올라갈 거면서 오지도 않고!”
내 말에 셋째 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매번 귀찮은 일은 피하고 욕심만 차리려 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삼각 김밥을 여는데 셋째 언니가 실수했다. 표시한 곳에서 벗기지 않아 싸놓은 김이 비죽이 열렸던 것이다. 나는 깔깔대며 벗겨준다고 언니의 김밥을 다시 열다가 김이 홀라당 벗겨져 버렸다.
“아이고 속이 다 나와 버렸네.”
“하하하”
......
“어쩌면 지금이 둘째 언니와 소중한 추억을 마련하라고 하느님이 주신 시간일 거야”
셋째 언니가 크게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맞아, 하느님이 주신 시간! 그 말이 시원한 청량음료처럼 가슴에 스며들었다. 굳어졌던 내 마음이 풀리는 것 같다. 언제 이렇게 자매끼리만 오붓이 오래도록 있어 보겠는가? 같이 구경 다녔어도 우리끼리만 그렇게 오래 자본 적은 없었다. 가능하면 둘째 언니와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야지. 엿새의 소중한 시간이다.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둘째 언니도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