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이들은 꼬리표를 달고 올라온다. 만나보기도 전에 건네지는, 꼬리표는 주로 안 좋은 것들이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말이기에 교사는 그 꼬리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1991년 3월, 전근하자마자 나는 00고등학교 1학년 중에 가장 힘든 반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그중에 제일 힘들게 할 아이가 경현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경현이는 이웃 중학교에서 3학년 학생들이 굴직한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주동자였다고 했다. 그럼에도 정작 본인은 한 번도 안 걸려 들어갔다는 말과 함께 웬만한 교사 뺨칠 만큼 영악해서, 전 담임이 그 아이 때문에 어지간히 속 썩었다는 얘기였다.
그때까지 남자아이들을 상대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분명 경현이는 그때껏 내가 만난 아이 중 가장 까다롭고 힘들 인물일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결혼한 지 열흘 남짓한 때였는데, 신혼 선물치고는 고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담임을 맡았으니 내가 잘 해결해야만 했다.
3월엔, 각종 사무적인 요구가 정신없이 몰아친다. 사진 대장, 출석부, 선도부 제출 자료, 우유 급식 희망자, 건강 기록부, 교무 수첩에 학생 자료 정리, 보충 수업 희망자 조사 등등. 그뿐 아니라 각자가 담당하는 잡무는 또 따로 있어서 그런 문서까지 작성하다 보면, 어떨 때는 화장실 가기도 힘들었다. 그러기에 수업 연구는 늘 집에서 해야 했다. 그나마 3월부터 야간자율학습이 잘 정착되도록, 담임 모두가 야간에 학교에 남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시간에 아이들을 상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아이들의 상담을 끝내야 ‘내가 품어야 할 내 새끼들’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들고 그럴 때 비로소 가슴이 꽉 차오르곤 했다.
경현을 불러 마주 앉았다. 아이는 그리 크지 않았고 똘똘해 보였다. 긴장된 표정이지만 기죽지 않겠다는 듯 꽉 다문 입술과 주먹 쥔 손엔 어떤 결기가 느껴졌다. 겨울 방학은 잘 보냈는지, 고교에 입학해서 기분이 어떤지? 앞으로 계속 자율학습을 할 텐데 중학 때 보다 힘들지 모르니 조절 잘하라는 당부를 했다. 학생 개인을 파악하기 위한 질문을 던지던 중 부모님은 뭐 하시는지? 묻는데 아이가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 같더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뜸 들이다가 내가 말을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는 말이지...... 편안한 교사 생활을 버리고 배 밑바닥에 붙어서 일본으로 밀항을 하셨어. 그래서 나는 어렸을 적에 경찰에서 누가 우릴 잡으러 오지 않나 어머니랑 걱정하곤 했단다. 우리 아버지는 15년 동안이나 고춧가루 공장 같은 데서 콧구멍에 휴지 쑤셔놓고 일을 하셨대. 딸자식까지 공부시키려고 말이야. 그랬기에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덕에 교사가 될 수 있었단다...... 오늘 얘기는 너와 나만의 비밀로 하자.”
얘기를 끝내고 아무 말 않고 그저 경현이를 바라보았다. 경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의 눈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진 노름꾼이세요. 밖에 나가서 노름하는 바람에 집안은 편치 않아요. 그 때문에 저는 중학교 때 힘들었어요......”
아, 아이는, 그저 아이인데 혼자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힘이 약한 존재에 불과할 뿐인데, 많이 부풀려져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안쓰럽기도 하고 속을 터놓는 걸 보니, 앞으로 아이와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마음도 놓였다. 나는 아이에게 아버지 문제로 힘들었겠다고 공감하면서 고교 생활은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이니 열심히 공부해보자고 매듭지었다.
그 후로 경현이는 별 무리 없이 학교생활을 잘해나갔다. 어쩌면 중학교 때 심한 사춘기를 보내고 고교에 오면서 마음이 자랐는지도 모른다. 더러 다른 선생님들은 경현이가 반항적인 것 같다고 말했지만, 나를 대하는 아이의 태도엔 그런 게 없었다. 둘만의 비밀 얘기를 공유하면서 동지(?) 의식이 생겨서였을까? 아이는 의젓하게 고3까지 잘 자라주었고 경영과로 진학을 했다.
그처럼 경현이에 대한 꼬리표는 내 마음을 무겁게 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전근 가면서 나를 대하는 관리자의 태도를 보며 ‘나도 꼬리표를 달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서였을까? 다른 사람이 내게 옮기는 말만 믿고 그냥 아이를 단정하지는 않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것이 어쩌면 아이와의 관계를 잘 트게 한 단초였는지 모른다.
관계는 이처럼 작은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꼬리표는 그저 작은 표식일 뿐. 아이는 멀리 날아갈 수 있는 연이었다.
(나는 1991년에 **여고에서 00남고로 전근 갔다. 공립학교 교사는 5년마다 학교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전교조가 결성되어, 1989년에 전국적으로 1527명의 교사가 해직되었는데, 해직시킬 자를 가리는 과정에서 협박과 회유가 진행되었다. 그것은 교감의 능력을 가리는 잣대가 되었고 얼떨결에 나도 회유의 대상이 되어 해명서를 써줬다. 그러다 보니 관리자에게는 내가 어려움을 갖게 할 교사라는 꼬리표 달고 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