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김밥을 쌀 때면 중학교 시절의 봄 소풍이 떠오른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시골 중학교였던 우리 학교에는 학교 행사에 후원할 만한 여유 있는 학부모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밭일에 바빴고, 학교 일에까지 신경 쓸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소풍에 동행하는 선생님들의 도시락을 가정 선생님에게 맡기는 관행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은 자연스럽게 2학년 여자반 여학생 간부들의 몫이 되었다. 게다가 선생님은 통닭까지 준비하라고 하셨다.
당시는 1970년대였다. 우리 동네는 면 소재지라 오일장 외에는 변변한 가게도 없던 시절이었다. 장날은 아직 멀었고, 마땅히 살 곳도 없어서 수업이 끝난 뒤 반장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까운 한림읍으로 나갔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과연 닭을 살 수 있을까’ 걱정하며 생각을 거듭하다가, 읍내에 사는 큰언니의 시어머니, 사돈댁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해 함께 시장으로 갔다. 어떻게 통닭을 샀는지는 또렷이 기억나지 않지만, 노란 황톳길에 먼지가 풀풀 날리던 시장통에서 사돈 마님의 뒤를 머쓱하게 따라가던 모습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늦은 오후, 반 여학생 몇 명이 우리 집에 모였다. 가정 선생님이 우리 집 밖거리(바깥채)에 세 들어 살고 있었기에, 그곳에서 김밥을 싸기로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퇴근이 늦어 우리는 먼저 방에 들어갔는데, 안에는 치우지 않은 쓰레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늘 집안을 깔끔하게 유지하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는 그 모습이 낯설고 놀라웠다.
“야, 이거 보라 이거 뭐꼬. 아이고 더럽게도 살암져이~ ”
혀를 차며 방을 치우고 앉아 선생님을 기다렸다. 그땐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스물다섯의 어린 나이에 타지에서 홀로 생활하던 부잣집 딸내미라, 정리에 익숙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뒤늦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곧 선생님이 오시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김밥 만들기에 들어갔다. 좁은 부엌에서 몸을 부대끼며 쌀을 씻고, 물을 맞추고, 곤로에 밥을 지었다. 선생님은 물과 식초, 설탕, 소금을 섞어 소스를 만들며 김밥 맛의 비결을 알려주셨다. 누군가는 달걀지단을 부치고, 누군가는 당근과 양파를 볶았다. 나는 시금치를 데쳐 무쳤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재료를 방바닥에 펼쳐 놓았다. 선생님은 큰 양푼이에 밥과 소스, 깨, 참기름을 섞었다. 참기름 향이 퍼지자 절로 침이 고였다. 김밥을 말고 남은 꼬다리를 나눠 먹었다. 우리들 대부분은 처음 싸 본 김밥이었지만, 유난히 맛있었다. 함께 만들고 함께 먹어서였을 것이다.
정작 소풍 당일의 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상의는 교복에다 운동복 바지를 입고 수월봉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던 장면만 희미하게 남아있다. 김밥도, 통닭도 무사히 잘 넘어갔던 모양이다.
세월이 흘러 나도 교사가 되어 시내의 중학교로 전근을 갔다. 서울랜드로 소풍을 갔을 때였다. 아이들을 풀어놓고 지켜보고 있는데, 몇몇 아이들이 “엄마가 보내셨어요” 하며 도시락을 놓고 뛰어갔다. 어느새 내 앞에는 김밥 도시락이 여러 개 쌓였고, 치킨 상자도 몇 개나 되었다. 나는 그것들을 다른 선생님들과 나누어 먹고, 남은 것은 학교에 두고 오거나 집에 가져와서 먹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선물을 가장한 마음의 표현이었고, 정이 오가던 풍경이었다. 그러나 촌지 문화가 사라지면서 그런 모습도 함께 사라졌다. 지금은 과자 한 봉지조차 나누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물론 선생님께 무엇을 건네는 문화가 사라진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부담 없는 관계, 투명한 관계는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서로를 향한 작은 배려와 따뜻한 마음마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닐까, 문득 생각하게 된다.
김밥을 함께 싸며 웃던 아이들, 좁은 부엌에서 부대끼던 시간, 꼬다리를 나누어 먹던 그날의 봄날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음식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