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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Dec 26. 2021

T콘도 1302호

함께 하는 여행의 어려움..

  즐거운 여행이라 생각했다. 중산간도로에 피어있는 억새꽃 무리를 보는 것도, 붉게 물든 동그란 해가 가라앉으며 생기는 서쪽 바다의 저녁노을도 장관이어서 남편과 나, 그리고 딸 우리 셋은 모두 들떴었다.


  여행 첫째 날 우리는 한라산을 갔다 돌아왔었다.

성판악 코스로 오르는 한라산은 미리 등산을 예약하고 가야만 했는데 아침 8시에 등산을 시작하는 것도 괜찮았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돌길도, 올라갈수록 눈과 얼음이 있어서 더이상 등산을 못하고, 사라오름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좋았다. 사라오름에서 백록담을 바라보며 딸은 기쁨의 미소를 지었고 나는 여행이 계획대로 잘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T 콘도의 객실은 1302호

우리는 그곳에서 일주일간을 머물 생각이었다. 그런데 도착하던 날, 키를 받을 때부터 문제였다.


“일주일 묵을 건데, 언제 청소를 해주나요?” 


  남편이 묻는 말에 일주일이면 청소를 안 해준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딸은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단 하루만 묵어도 사람이 나가고, 그리고 나면 객실 청소하지 않냐? 고 되물었고 규정상 안 된다는 말만 툭 내뱉더라고 화가 나서 돌아왔다. 우리는 사나흘도 아니고 일주일씩이나 청소를 안 해준다는 말에 서로 기막혀하면서 콘도 안에 들어섰다. 


  콘도 안에서 보는 제주 바다는 참 아름다웠다. 때마침 해 질 무렵이라 동그랗고 붉은 해가 수평선 근처로 다가섰다. 야자수 이파리가 흔들거리며 저녁 공기를 쓸고 있었다. 흥분했던 마음은 가라앉았고 딸이 김치찌개를 끓여서 우리는 흡족하게 저녁을 끝냈다.


  “엄마, 지금 설거지하고 있어?”


  딸이 목욕탕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 욕실에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결국 딸 아이는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끝냈나 보다. 


  우리는 큰 방, 딸은 작은 방을 썼다. 큰 방에는 침대가 2개 있었고 작은 방은 이부자리를 깔고 자는 구조다. 

“엄마 이불이 깨끗하지 않아” 여행 첫날 아침에 딸이 무심히 던졌었다. 그러나 도착하던 날 밤에 이부자리를 깔고 편히 누웠던 딸의 모습을 보았던 터라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여행 둘째 날, 우리는 제주 올레 10코스를 걸을 참이었다. 중산간도로를 달리다가 도로 왼쪽에 억새꽃이 무릴 지어 밭을 이루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가던 길을 멈추고 차에서 내려 억새밭으로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화순 금모래 해수욕장부터 시작하여 근처의 해안을 따라 걸었다. 송악산 둘레를 돌고 일제 잔재인 알뜨르 비행장을 지났다. 전체가 20km의 구간이었는데 우리 셋은 걷다가 보말 국수도 먹고 함께 벤치에 앉아서 형제섬을 바라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날 저녁은 카레밥. 요리도 딸애가 신나게 했다. 나는 혼자서 드라마를 보고 남편은 커피를 준비하려는데 커피잔이 2개 밖에 없다. 설거지하던 딸이 프론트로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 내가 전화를 걸었다.


   “여기 1302호실인데요, 객실에 컵이 2개밖에 없네요. 우린 세 사람인데.”


  프론트 담당자가 객실로 가져다준다는 말에 고맙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기에 작은 공기에 커피를 담아 마셨다. 커피를 마신 후 나는 방 안에 들어가서 즐겨보던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초인종 소리가 울리더니 ‘그런 플라스틱 물컵이 아니고 커피를 마실 잔’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 비치된 컵과 달라 실랑이가 오갔나 보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에 빠져있었다.


  밤 11시가 넘어가는 시간, 남편은 피곤해서 이미 잠자리에 들어갔고 나는 혼자서 넷플릭스로 사극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 있을 때였다. 딸애가 들어오더니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거다.


   “엄마, 엄마는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이 콘도가 너무나 맘에 안 들어. 여기서 환불받고 나가면 안 될까? 환불이 안되면 내 돈으로 빌릴께. 나는 이런 대접 받고 싶지 않아”


  딸의 태도는 내가 전혀 생각을 못 한 거였다. 나의 뜨악한 표정을 보자 딸아이는 한두 번도 아니고 사소한 일이라도 연달아 불편한 일이 거듭되면 여행이 기분 좋을 수 있겠냐며 매우 불쾌하다는 거다. 친구들과 왔더라면 이런 콘도를 잡지도 않았겠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벌써 환불받고 나갔을 거라면서. 

나는 뷰가 이렇게 좋은데도 방 2개에 7만6천원이면 사소한 불편쯤은 감수할 수 있지 않냐고 맞받아쳤다. 


  “엄마, 나는 돈을 더 줄지언정 이런 곳을 잡지는 않아. 평가가 2.5점 정도 되는 걸 보면서 어떻게 이런 곳을 택할 수 있어? 나 같으면 호텔을 찾고 친구들에게 일단 물어봐. 그곳이 괜찮은지? 엄마는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갑자기 서 있다 뺨 맞는 기분이 들면서 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딸아이와 나는 같은 가족이면서도 생활 수준에 차이가 있는 걸까?’ ‘나는 서민이고 그녀는 서민이 아닌 걸까? 왜 이렇게 다를까?’

내가 말했다. 


  “아빠와 나는 아주 좋은 호텔을 고르지 않아,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돈이 많지도 않지만 있다 해도 굳이 그런 데다 돈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든. 객실이 이 정도면 깨끗하고 이 빠진 그릇이 있거나 커피잔이 하나 없어도 나는 만족해. 물론 욕실 물이 잘 안 빠지는 불편도 있지만 그런 것도 감수할 수 있어. 그렇지만 너에게 물어보지 않아서 미안해”

 

  나는 딸아이에게 환불받을 명분도 부족하거니와 나머지 사흘의 숙박비를 포기하면서까지 나갈 생각은 없으니까 이해를 해 달라고 했다. 딸 아이는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을 해서 답답함이 가라앉았다면서 그 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나는 속상했다. 딸이 너무 자기주장대로 받아들여지길 바라는 태도가 마뜩잖았다. 가격이 저렴하면 다소 부족해도 이해하고 넘어가 줄 수도 있지 않나? 저렇게 모든 걸 다 채워줘야만 하는 건 과도한 요구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틀린 걸까? 아니면 딸이 지나친 걸까? 요즘 세대가 그런 걸까? 아니면 우리 애가 특이한 걸까?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유쾌하지 않았다.


  밤 11시 반이 되어서 나도 목욕하고 쉴 생각으로 수돗물을 틀었다. 어라 이게 왠일인가? 전날 저녁에 설비 기사가 와서 뜨거운 물이 안 나오면 해보라는 요령대로, 내가 뜨거운 방향으로 수도꼭지를 돌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뜨겁기는커녕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식어버린 커피처럼 미지한 물을 끼얹어 샤워를 끝내고 얼른 이불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여기 뜨거운 물이 또 안 나오네. 이제 그만 환불받아야겠어요.”     


  그다음날 우리는 콘도 측에서 권하는 대로 신관으로 옮겨갔다. 신관 2302호. 들어서는데 훅하고 퀴퀴한 하수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신관은 구관보다 좀 더 넓었고 경치는 조금 못했다. 그래도 그곳에선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딸은 방을 둘러보더니 내게로 돌아서며 애써 웃어 보였다. 

  “엄마, 화장실이 2개야”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했다. 11월 말, 제주 바다의 시원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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