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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Jan 07. 2022

세월 따라 가버린 것들

2021년 가을_추억의 회상

  오색 약수터로 여행을 떠났다. 과천에서 3시간 넘게 차를 달려 도착하니, 생각보다 가을 산행을 하는 차량이 많다. 음식점마다 차가 만원이었다. 겨우 주차장에 차를 들여놓고 나서 걸어가는데 남설악 호텔이 보였다. 36년 만이다. 이 건물을 본 게.     


  대학교 3학년 가을에 우리의 수학여행은 강릉, 양양, 속초를 돌아오는 동해안 코스로 결정되었다. 동기생 30명 중에서 유일하게 갈 수 없을 뻔한 나를 위해 교수님이 아버지를 설득하셨고 그 덕분에 다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강릉 경포대 부근의 큰길에서 경포호를 따라 걸어서 경포 비치로 가야 했다. 모두 여행 가방을 하나씩 든 채로 한 시간이 넘게 걸어야 했던 그 길은 왜 그리 멀었던지. 그래도 말동무인 명숙이가 있어서 참을 수 있었다. 우리가 걷는 길 양쪽에 서 있는 벚나무가 빨갛게 불타는 시선으로 우리를 반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경포대 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 택시를 타고 먼저 떠났던 교수님은 취기가 돌은 불콰해진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우리는 그 집에서 함께 매운탕을 먹고 인근의 춤추는 클럽에 가서 가볍게 맥주 한 잔씩 돌리고 춤을 추었다. 


  1984년 당시만 하더라도 춤을 그리 잘 추는 친구가 없었고 여학생들은 술 마시고 춤추는 것을 스스로 못마땅한 척하는 분위기였다. 여자라면 행동을 조신하게 굴어야 하고 소주 한잔을 벌컥 마시는 것은 여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조이고 살았던 때였다. 그러나 멀리 졸업여행까지 온 그날은 모두가 모여 디스코를 추고 끼리끼리 부르스도 추웠다. 여자 남자끼리는 쑥스러워서 춤추지 않았고 돋아난 흥에 겨워 동성끼리 손을 맞잡고 움직여보는 거였다.


  뒷날, 남설악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은 다음 우리는 산책을 나갔다. 대여섯 명의 여학생이 함께 나선 것이었는데 숲속 산책길로 가는 길엔 가로등이 없었다. 대신 달이 떠서 달빛을 받으며 걸을 수 있었다. 청아한 공기 속을 걷다가 어디선가 폭포가 있는 듯 물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미드나잇블루라는 팝송을 입으로 흥얼거리면서 둘씩 손을 맞잡고 부르스를 추웠다. 잠시 잠깐 추는 춤이었지만 서로 깔깔 때며 웃을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저녁 산책을 끝내고 돌아왔더니 나머지 친구들 전체가 모여 있었다.  술과 안주가 놓여 있었고 학년 다과회 시간을 갖게 되었다. 공식적인 얘기가 끝나고 자연스레 삼삼오오 모여앉아 술을 마셨다. 

  J만이 유일하게 남자친구와 둘이서 앉았다. 우리 중 유일한 과 커플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평소엔 술을 잘 마시지 않던 J가 홀짝대며 맥주를 많이 마셨다. 남자 친구는 연거퍼 그녀에게 맥주를 따라주었고 누군가가 어, J가 오늘 잘 들어가는데!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그들은 산책을 나간다며 밖으로 나갔고 나는 얘기에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을 잊었다.


  한 참 시간이 흐르고 잠을 자러 갔는데 J의 친구인 선희가 찾아왔다. 

  “언니, J 못 봤어? 아무래도 이상해. 어딜 갔는지 모르겠어.”


  선희와 나 그리고 나의 친구 명숙이가 함께 J를 찾아 나섰다. 달빛만 흐릿할 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숲을 향해 걸으며 우리는 J를 불렀다. 한참을 불렀더니 어디선가 희미한 모습이 비치면서 J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던 남자친구는 슬그머니 사라져갔다. 나는 다가가 J의 팔을 잡았다. 


  “무슨 일이야? 걱정했잖아. 괜찮니?”


  J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울고 있었다. 우리는 J를 데리고 남설악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자세히 보니 그녀의 옷에는 잡풀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걸 본 순간 퍼뜩 생각되는 게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의 순결은 중요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우리는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옷에 붙은 지푸라기들을 떼어주었다. 그리고 진정되면 들어오라고 얘기하고는 그녀를 두고 방으로 돌아오면서 서로 약속했다. 방금 봤던 일은 우리끼리만 비밀로 하자고.  

   

  사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옛날 우리는 큰일이 난 것처럼 말도 못 꺼내고 쉬쉬하며 지켜주려고 했었다. 

  요즘이라면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학을 졸업한 후 J와 남자친구는 헤어지게 되었고 지금은 그저 빛바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옛날이야기만큼이나 남설악 호텔도 중늙은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남편의 뒤를 따라 발에 힘을 주며 산길을 걸었다. 뒤에 남은 남설악 호텔이 애잔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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