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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Mar 12. 2022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자꾸 허탈해진다. 다리가 푹푹 꺽일 것 같다. 

  어? 20대 대선 발표일인 어제는 괜찮았는데 왜 그러지? 그랬다. 어제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윤 대 이가 48.56% 대 47.83%이다. 0.7% 차이로 진 것만으로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언론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이런 나라에서 그만큼 했으니 국민들은 현명하다는 것 아닌가? 아무리 보수언론이 큰 입으로 퍼부어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입증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마음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반응은 뭐지? 늙어서 회복 탄력성이 떨어진 걸까? 예전엔 어땠을까?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번만 한 건 아니지 않아?      


  아침 직원 조회도 아닌데 급작스럽게 선생님들 모두 교무실로 모이라는 방송이 들렸다. 교무실에 갔더니 덩치 큰 흑백 텔레비전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하고 있었다. 각자 자리에 앉아 그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강압이 느껴지는 그 말투, 그것이 전두환이 불안을 느껴 발표한 4.13 호헌 조치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전두환을 위시한 군인들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영구집권하고자 7년 단임, 간선제로 대통령을 뽑도록 헌법을 고쳤다. 직선제 요구가 강해지자 전두환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그 헌법을 지켜야겠다고 1987년 4월 13일에 공공연히 선포한 것이다. 학생들의 수업 시간을 뺏기면서도 우리는 아무 말 못하고 들어야 했다. 

  대통령만 강압적인 게 아니라 학교장도 비슷했다. 아침마다 교장 선생의 지시를 전달하는 교직원 조회에는 우리 반이 지적당하지 않나 두려웠다. 교장의 훈화를 들으며 나는 말없이 책상 위 종이에다 노래가사를 적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그 가사들을 적으며 나는 위안을 삼았던 것 같다.    

  

  북한의 금강산 댐 때문에 물이 터져 서울이 물바다가 될 거라고 했다. 1987년 가을, 우리는 오후수업을 빼고 학생 전체를 이끌고 군민회관 앞으로 단체 궐기대회를 하러 갔다. 군부 독재가 억지로 엮은 핑계라는 걸 알았기에 내 가슴은 답답했다. 그러나 ‘학교장의 명을 받들어 교육을 해야한다’는 것이 교육법에 명시되어 있던 때라 불만을 표출할 수도 없었다. 

  해 맑은 아이들은 밖으로 나온 것이 즐거운지 웅성거리며 섰는데, 어디서 온 어른들이 연단에 올라서더니 담화를 읽고 구호를 외쳐댔다. 물론 그 구호는 거짓이었다. 아이들에게도 그 거짓 구호를 따라서 외치게 했다. 그때도 하릴없이 친한 선생들과 멀찍이 서서 냉소 짓던 생각이 떠오른다. 교육과 상관없는 일에도 교장의 서슬 퍼런 한 마디, ‘사제동행’하라면 끝나던 때였다.     


  당시 교복 대신 자유복을 입고 등교하던 시기가 있었다. 반공이 얼마나 강조되었던지 빨간색은 금기였다. 그날도 아침에 교실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학교 뱃지와 이름표는 달았는지 점검하였고 아이들은 교실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갑자기 교장 선생이 나타나서는 우리 반 모범생 조숙희의 이름을 묻고 나갔다. 아이는 아이보리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팔꿈치가 있는 소매 중간만 굵은 띠처럼 빨간색을 두르고 있었다. 교장은 등교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소매 중간에 끼어있는 빨간색이 문제라고 따라왔나 보았다. 아이는 학생부로 불려갔고 학생부장은 아이를 구슬려 그 옷을 입고 오지 않도록 했다. 나는 학생부장에게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따졌으나 교장에게 찍혔을 따름이다. 교장의 레드콤플렉스가 아이에게 상처를 줬음에도 교장이기에 아무도 말 못하던 시절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후 6.29선언이 있었고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되었다. 그해 가을 드디어 군부 독재를 끝내고 대통령을 직접 뽑는다고 우리는 모두 들떠 있었다. 당시 양김(김영삼, 김대중)씨에 대한 얘기가 오르내리며 온 시골 동네도 떠돌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로 학교 안팎 어디서나 활기가 돌았다. 


  그런데 ‘양김’ 중 누구도 양보하지 않아 6․29선언을 한 노태우와 김영삼, 김대중 모두가 후보로 나섰다. 사람들은 다시 누구를 뽑을까로 갈라졌다. 선거를 하고 하루가 지나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우리는 모두 낙담했다. 12월의 싸늘한 공기가 교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교장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 만면에 미소와 여유를 한껏 풍기면서.


  그날 수업을 끝내고 닭갈비 집에 모여 앉아 친한 선생끼리 소주를 마셨다. 한잔을 들이키고 찌르르한 기운이 온몸에 퍼져도 내 가슴에 찬 기운은 없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대뇌던 기억이 떠오른다. 컴컴한 굴로 들어가듯이 마음이 어두웠었다. 우리가 믿던 ‘양김’씨가 야욕에 차서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원망과 여전히 군부 시대라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 민주화의 열망이 꺽였다는 생각에 절망스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그 시절도 견디어 내었다. 

    

  그럼에도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살다 보니 살아지더라. 설마 검찰 공화국이 들어설까? 절반의 눈이 있는데. 절반만 보고 가진 않겠지?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다리 꺽인 나를 일으키려고 나름 주문을 외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아버지처럼 당당하게 소리치고 싶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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