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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Apr 15. 2022

외숙모가 돌아가셨다

  외숙모가 돌아가셨다. 올해 나이 102세. 

  나와 언니는 얼른 비행기 표를 끊고 제주로 날아갔다. 진눈깨비가 조금씩 흩날리는 공항에 서서 친구를 기다렸다. 눈 때문에 교통이 막히는데도 친구 선열은 차를 몰고 와주었고 우리는 함께 제대 장례식장으로 갔다. 시내 도로에는 눈이 다 녹았는데 중산간에 있는 장례식장이라 그곳에는 눈이 조금 쌓였다.


  저녁 7시가 넘어서인지, 다시 거리 두기가 심각 상태로 바뀌어서인지 장례식장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나와 셋째 언니는 외숙모님의 영정 사진 앞에 섰다. 2년 전 외숙모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동갑내기 남정네가 같이 살아시민 참 좋켜..."


  ‘아, 100살이 되어도 죽음은 점점 더 두렵고 홀로 맞이해야 하는 삶도 버거운 것!’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던 외숙모가 드디어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니 울컥했다. 그러나 상주인 오빠들은 모두 다 덤덤하다. 서글픔이 안 느껴진다. 무슨 까닭일까? 당신이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에 그리한 걸까? 호상이라는 게 정말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외사촌 올케언니가 멀리서 비행기 타고 오느라 애썼다고 칭찬을 했다.     


  “아이고 우리 수정인 눈발에 비행기가 안 떰 땐 허연게 잘도 왔져이. 착허다.”     


  그러고 보니 올케언니의 동생이 비행기 때문에 못 온다고 한 모양이다. 선열이와 나 그리고 셋째 언니가 식탁에 앉았는데 동창생이자 외사촌인 미자가 우리 자리로 왔다. 미자는 생각도 안 한 친구가 문상을 온 것이 고마운지, 연신 선열의 손을 쓰다듬으며 애썼노라고 한다. 나는 오랫동안 외숙모를 돌본 외사촌 미자에게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인사를 건넸다.      


  “게메이. 영헐쭐 알아시민 좀 더 돌봐드릴걸. 생각보다 빨리 돌아가셔신 게.”

   (글쎄. 이럴 줄 알았더면 좀 더 돌봐드릴걸.)    

 

  외숙모님께는 아들이 넷, 딸이 둘 있었다. 그런데 101살이 된 외숙모님이 뇌출혈로 왼쪽 다리에 마비가 오게 되자, 막내딸인 미자가 간병을 하겠다고 나섰다. 미자는 가족들을 모두 서울에 남겨둔 채 제주로 내려가 외숙모와 함께 생활했다. 그러는 동안 외숙모는 건강이 점점 좋아졌다. 8개월이 넘어가자 미자도 더이상 가족을 남겨둔 채 외숙모와의 생활을 지속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외숙모는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외숙모를 요양원에 두고 나오면서 미자는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모시러 오겠노라고 했나 보다.    

  

  “요양원이 겅 싫어신지, 어머니가 휠체어를 내치며 ‘우리 집 가켜. 미자 데령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댄 허여라”     


  말하는 미자의 얼굴에 울컥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음이 넓고 행동이 진중하던 외숙모가 침대에 묶일 만큼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만큼 요양원이 싫었음에도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붙잡혀 있어야 했던 외숙모의 서글픔이 고스란히 가시가 되어 내 가슴에 박혔다. 요양원에 들어가신 지 세 달만 이었다.     


  “게메이 우리 어머니도 죽을 때까지 요양원에 계셔신디, 두 다리도 펴지 못헌 채 누웡 살아시녜. 요양원에서 아프댄 연락오믄 병원에 모셔강 치료하고...... 경 허다보난 요양원에서 10년 넘게 살아신 디, 사는 게 사는 거 아니라.”      


  선열이가 맞장구를 쳤다. 그들의 말을 듣고 보니 늙어서 요양원에서의 삶을 살다가 죽어야 하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밖을 걸어 다닐 수도 없고 점점 침대에 누워 있다 보면 근육은 빠지고, 욕창은 생기고 삶은 꺽이는 것인가 보았다. 요양사가 가장 좋아하는 환자가 누워서 기저귀만 갈아주면 되는 환자라고 하는 소리를 들으며 그게 어디 삶인가 싶어 몸서리가 쳐졌다. 늙어서 기운이 빠지고 아프게 되면, 자신이 살던 집에서 살 수 없이 내쳐지고 자신의 요구와 상관없이 요양원으로 가야 하다니 참 서글프다.  

   

  문상을 마치고 친정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이 되어 오랜만에 형제자매들과 함께 바닷가로 나갔다. 차를 마시러 커피숍으로 들어갔는데 코로나 2차 접종 증명을 먼저 내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포기하고 돌아섰다. 둘째 언니가 핸드폰이 없어서다. 언니와 함께 사는 남동생이 스마트폰을 못 하게 한 것이다. 언니보다 더 나이 많은 할머니도 스마트폰을 하는데 사기당할까 봐 스마트폰을 쓰지 못한다니 안타까웠다. 둘째 언니는 인터넷도 못 하고 카드도 없다. 어디를 가든 불편하다. 죽을 때까지 문명의 이기(利器)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언니가 가엾다. 속이 쓰리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어 어쩔 수 없다.      


  밤늦도록 모여앉아 술 한잔 걸치며 얘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남동생이 어렸을 적 사진을 꺼내었다. 사진을 보니 할 얘기가 참으로 많았다. 내 어릴 적 모습은 거지와 다를 바 없는데 환하게 웃고 있다. 동생과 내가 키들거리며 웃었다.     


  “너는 옷이 고운데 나는 다 헐어빠진 옷을 입고 있네. 여기 구멍 난 거 봐. 검은 고무신에 양말도 안 신고, 그래도 좋다고 웃고 있어”     

  대청마루에 앉아서 동생을 껴안고 있는 어린 나를 본다. 사랑스럽다.


  외숙모의 죽음으로 오랜만에 형제자매끼리만 모여앉아 밤늦도록 얘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마주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우리도 점점 늙어가면서 각자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오리라. 그 전에, 살아 움직일 수 있는 동안에 함께 먹고 나누고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하리라. 


  셋째 언니와 내가 내려갔다고 어떻게든 편하게 해주려고 애쓰는 남동생, 늘 안타까운 둘째 언니, 가슴 아파하는 셋째 언니와 나...... 핏줄은 그렇게 끈끈한 것, 속상하고도 안아야 하는 것, 그래서 아름다운 것 그런 것인가보다. 그리고 그렇게 애태우며 울고 웃다가 죽어가는 것이 인생살이인가 보다. 이부자리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지은 지 45년이 되어가는 친정집 유리 창살의 다이아몬드 나무 문양도 늙어가고 있었다. 이 집을 지었던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좋다 하시던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동생도 머리가 벗겨져 이마를 훤하게 드러내고 나도 머리가 허옇게 시들어간다. 어디서나 쇠락은 소리 없이 내리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뒷날 비행기 타기 전 아침, 미국에 있는 큰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요양원이 싫어. 나 늙으면 요양원에 데려가지 마”

  “엄마 그러면 나는 여기 시민권을 만들어야겠다. 언제든지 엄마 곁에서 오랫동안 같이 있을 수 있게 말이야”     

  딸의 대답에 심장에서부터 온몸으로 따뜻한 온기가 퍼져나갔다. 내 가슴에 찔렸던 얼음 가시가 그 소리에 다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기면 안심되듯 딸의 대답은 내게 그런 안정감을 주었다.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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