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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Mar 27. 2022

아버지의 선택

  “너 어린 아이냐?”


  아버지의 한 마디가 비수처럼 심장에 내리꽂혔다. 나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가정집 몰래바이트(전두환 정권의 시절,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금하여 생긴 이름)로 들어간 집에서 어렵게 전화를 했건만 내 얘길 들은 아버지는 단호했다. 나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도망자처럼 되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바다를 가르며 헤엄쳐 다니는 고등어처럼 물 만난 고기로 살고 싶었다. 내게 물은 서울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에서 이화여대 교정을 본 순간부터 그곳이 내겐 희망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섬에 갇힌 수형자처럼 느꼈었다. 섬, 끝없는 수평선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곳. 게다가 나는 지독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교 진학할 때 넷째 언니가 나를 이류학교로 떠미는 바람에 생겨난 거였다. 그래도 새로운 희망이 생기자 고교 생활을 버텨낼 힘이 생겼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멋진 캠퍼스에서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자.’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3년의 노력으로 얻어낸 학력고사 성적표는 예상보다 초라했다. 그래도 원하던 대학에 갈 성적은 되었다. 그런데 막상 성적이 되니, 어머니가 눈물 바람으로 나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서울까지 딸자식을 유학시킬 돈은 없다는 거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지방대 사대에 갈 수밖에 없었다. 


  지방 사대 입학 후 나는 더 괴로움을 느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열등의식을 풀어줄 그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어렸고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눈이 없었다. 그런 내게 지방대학은 촌스런 캠퍼스, 초라한 강의실일 뿐이었다. 게다가 책상에 금을 그어 놓고 짤짤이 놀이나 하는 남학생들을 보니 그런 애들과 공부한다는 게 한심하게 느껴졌다. 강의도 별 볼일 없어 보였고 그 어디에도 정붙일 곳이 없었다. 

  1학년이 끝날 무렵 안 되겠다 싶어 과감히 휴학계를 냈다. 받아두었던 장학금으로 아무도 몰래 혼자서 재수를 시작했다. 경제적 독립을 하려면 의대에 가야 했다. 내 꿈은 서울에 있는 의과 대학으로 바뀌었다. 


  그해 가을 무렵, 일본으로 밀항해서 돈을 벌던 아버지가 늘그막에 돌아오셨다. 나는 의대는 떨어졌지만 원했던 대학의 다른 과에 합격했다. 재수는 몰래 했으나 대학은 몰래 갈 수가 없었다. 등록 마감 하루 전날, 고향의 잔칫집으로 떠난 아버지를 찾아서 설득하러 갔다.


  차창 밖 풍경은 눈이 올 듯 날이 흐려져 있었다. 버스를 타고 시골로 가는 길, 내 입은 바싹 타들어 갔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잔칫집에서는 장작이 타고 있었다. 예전에 먹었던 팥 넣은 쌀밥에 몸국 냄새가 흐뭇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뭘 먹을 계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과 친지들에 섞여 계셨다. 나는 간곡한 목소리로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아버지, 등록금만 해줍써(주세요), 제발......”   

   

누군가 나의 역성을 들어주었다. 그 덕분인지 아버지는 등록금 한 번만 내준다는 조건으로 입학을 허락해주었다. 나는 원하던 대학 입학을 기뻐할 사이도 없이 일을 구해야 했다. 다행히 남의 집에 들어가 살면서 아이 공부를 가르치고 버스비만 받는 조건으로 몰래바이트를 구했다.


  2월 중순 서울로 떠났다. 어머니는 내게 신신당부하셨다. 주인집 눈에 나지 않게 아침에 일어나면, 방청소도 하고 마루도 닦으라는 거였다.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소갈비를 먹었던 날은 내가 주인집 몰래바이트생으로 입주하던 날이었다. 부모님 중에 한 분이 같이 오시는 줄 알고 주인아줌마가 특별 음식을 준비한 거였다. 너무 긴장을 해서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성내동에서 학교까지는 가는 데만 두 시간이 걸렸다. 등록금이 84만원 거금인데, 생활비도 벌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였다. 학과 조교와 상담을 했다. 마침 그녀는 나와 같은 제주 사람이었다. 내가 1년 대학 생활을 마치고 왔다고 하자 사립 사대의 앞날이 불투명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게다가 전액 장학금도 1명만 받을 수 있다는 거였다.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그래서 집으로 연락을 한 거였다.     


 “너 어린 아이냐?”

  아버지의 호통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분명 나는 약속했었다. 한 번만 등록금을 내주면 알아서 졸업하겠다고. 며칠 밤을 고민하다가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다행히 주인아주머니가 차로 내 가방을 실어다 주었다. 올라온 지 한 달 만에 도로 내려가려니 죽고 싶었다. 비행기가 꼬꾸라지기를 기도했다.     


  아버지를 본 순간, 내 눈에선 차가운 냉기가 뿜어졌다. ‘당신 때문이에요.’ 나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죽음을 생각했던 내겐 더이상 무서운 게 없었다. 나는 원망의 눈초리를 흘기며 가방을 팽개쳐둔 채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어머니가 내 가방을 들고 따라 올라왔다. 2층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은 죽음의 수용소로 가는 것처럼, 스스로 올라가면서도 잡혀가는 듯 무거웠다.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이제 다시 붙잡혀 밑바닥에 던져진 것이다.     


  “살 사람은 살아사주(살아야지).”    

 

  한국에 오신지 5년 만에 아버지가 담관암으로 서울대 병원에서 확진을 받은 순간, 당신이 하신 말씀이었다.

  그것이 아버지 선택이셨다. 아버지는 딸에게 과감한 선택을 요구하셨던 것처럼, 당신 목숨 대신 모두가 살 수 있도록 집을 살리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분은 내가 올라갔던 그 계단을 밟을 다리의 힘조차 잃어버린 채, 서울에서 제주로 돌아오셨다. 그리곤 천천히 죽어갔다. 6개월 동안 얼굴이 노랗게 변하다가 점점 검게 타들어 가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다가 오줌 줄을 꼽은 채 드러누우시면서.   

  

  당신도 살고 싶지 않았으랴. 나의 절망은 살다 보니 희망으로 바뀌었지만, 당신은 그렇게 가셨다. 나이가 들어가면서야 아버지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그리고 용감한 사랑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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