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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Mar 11. 2022

추억이라는 착각

  오랜만에 고향 친구 두 명을 만났다. 정실의 카톡으로 갑작스레 만난 모임이었다. 우리는 합정역에 있는 한정식집에서 돼지 불고기를 시키고 앉았다. 정실이는 몇 번 본적이 있지만, 복희는 7년 전 복희의 딸이 결혼할 때 보고는 처음이다. 가느다란 주름이 보였지만 선한 눈매를 가진 복희는 여전히 고왔다. 볼살이 통통한 정실이는 오랜만에 모여 밥을 먹게 된 것이 기쁜지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     


  “게난 정아, 나가 겅 요망져나시냐?”

                      (야무졌냐?)

  “응, 너 따라서 나도 중학교때 엿 장사를 했잖아. 너는 어디서나 당차게 잘 허더라.”    

 

  정실이는 내가 쓴 글, 엿 한 봉지의 주인공이 된 것이 기분 좋은 모양인지 동그란 부침개를 우리에게 나눠주며 싱글거렸다. 나는 오랜만인 복희가 반가워 옛 얘기를 꺼내 들었다.     


  “복희야 옛날 중학교때 너네 집에 가서 솥을 깼던 생각이 남져. 그때 다섯잎 클로버를 캔 뒤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우리가 다섯잎 클로버를 불행이라고 했던 거 기억 남샤?”     


   정실이가 불고기를 집다 말고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냐? 정이네 집 마당에서 고무줄 했던 기억은 남져만은......”   

  

  1970년대는 토요일에 오전 수업을 할 때였다. 복희네 엄마가 여행 간 동안, 복희는 새집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토요일, 수업을 끝내고 나는 다른 두 친구와 함께 복희네 집으로 가서 놀았다. 

  때는 봄이었고 논밭이 있는 복희네 집 주변에는 초록으로 뒤덮여 있었다. 우리는 쑥떡을 해 먹으려고 쑥을 캐다 쑥 옆에 있는 토끼풀을 보고 네잎 클로버를 찾아 나섰다. 한참을 뒤져 네잎 클로버를 찾아냈는데 거기엔 희한하게도 다섯잎 클로버도 있었다.     


  "애들아, 여기 다섯잎 클로버가 이서!"

  "어디? 어디? 정말 다섯잎이네”      


  내가 다섯 잎을 찾자 친구들도 내 옆에 둘러앉아 클로버를 뒤지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다섯잎 클로버가 여러 개 보였다. 우리는 다섯잎 클로버를 찾은 기쁨에 노래까지 흥얼거렸었다.

  집에 돌아온 우리는 쑥떡을 빚었다. 솥에다 물을 담고 아궁이에다 불을 지피고 찌는데 불이 아궁이 안으로 잘 들어가지 않아선지 쉬이 물이 끓지 않았다. 그때 우리 중 누군가가 뭘 했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뭔가 날아가서 쾅 소리를 냈다. 쳐다보니 다른 쪽에 있던 새 솥에 구멍이 나서 모두 깜짝 놀랐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포기를 않고 쑥떡을 하다가 그 솥까지 태웠다.

  게다가 쑥떡을 해 먹고 저녁엔 잡기 놀이를 하며 뛰어다녔다. 뛰다가 누군가 발로 마루를 찼는데 새 마루가 깨지면서 구멍이 났다. 그제 서야 멈춰 섰다.


  “이거 어떵허코? 너네 어무니 오시면 큰일났네. 새 마루까지 구멍을 냈으니...... 아무래도 그 다섯잎 클로버가 불행인가보다. 우리 그거 아궁이에다 불살라 불게” 

    

  내 기억은 그런 거였다. 내가 그렇게 추억을 꺼내 들었을 때 복희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아무튼 그나마 다행이었지. 부탄가스통으로 막다가 폭발했는데 솥 하나 깨지고 아무도 안 다쳤으니까. 이제 생각허믄 큰일날뻔 해서......”   

  

  아하, 그게 부탄가스통이었구나. 내 기억엔 그게 없었다. 그 사건은 내겐 ‘다섯잎 클로버로 생긴 불행이라는 이름의 추억’이었다. 그런데 친구는 다행이란다. 이렇듯 같은 사건에 대해서 갖는 추억이란 게 얼마나 다양한 빛깔인지......  게다가 이어진 복희의 얘기는 더욱 나를 놀라게 했다.  

   

  “정아, 나는 너가 빨래가정 오던 생각이 제일 우스워 게”


  내 기억엔 전혀 없는 것이다. 내가 빨래를 가져갔다니...     

  생각해보면 토요일 밤을 친구네 집에서 자고 일요일에 돌아오려면 내가 빨래할 시간이 없었겠다. 그래서 빨래까지 챙겨서 친구 집에 놀러 갔나 보다. 복희의 말로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빨래를 빨아야 한다고 수돗가에서 내가 야무지게 빨래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는 당당하게 빨래까지 챙겨갔던 나인데 나이 들어선지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고 게난 할망, 경허연? 너도 진짜 악착같은 데가 이서신게. 옛날 생각허멍 이 취나물이나 먹어보라.”

    (아이고 그러니까 할멈(친구를 부르는 애칭), 그랬었냐? 악착같은 데가 있었네. ) 

      정실이가 취나물을 권하며 호탕하게 웃는 바람에 우리도 깔깔대고 웃었다.   

  

  친구의 기억에는 없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또 다른 사건은 함께 목욕탕엘 간 거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시골에는 공중목욕탕이 없기에 친구들과 함께 목욕탕에 간다는 것은 부끄럽기는커녕 즐거운 일이었다. 

  함께 김이 펄펄 나는 희뿌연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눈앞이 아득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물이 반가워 얼른 뜨뜻한 물이 있는 탕 안으로 몸을 들여 넣었다. 그 순간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야이 비누칠도 안 행 들어왐시냐? 얼른 바깥에 나강 씻엉오라부져”

   (비누칠도 안 해서 들어오냐? 얼른 바깥에 나가 씻어오너라)     


  창피함이 훅 밀려와서 내 기억에 오랫동안 남았던 것일까? 우리는 그 아주머니 눈치를 봐가며 뜨거운 욕탕에 앉아 때를 불렸고 등이 간지러워질 때까지 참고 앉았다. 그리고 나선 둥그런 탕 주위에 서로 둘러앉아 때를 밀었는데 몽글몽글 밀리는 때가 하염없이 쏟아졌었다. 등은 친구들끼리 서로 돌아가며 밀어주었다. 나는 복희의 등이 빨갛게 되도록 때를 밀었다. 날렵한 허리에 나보다 키가 큰 복희의 등을 미느라 내 땀방울이 복희의 등에 후드득 떨어졌다. 이어서 복희가 내 등을 밀고 차가운 물을 끼얹었을 때, 나는 한 꺼풀의 뱀 껍질을 벗어버리듯 시원했던 느낌도 기억이 난다. 우리는 빨개진 햇복숭아 같은 얼굴들을 하고서 목욕탕을 나섰었다. 


  내 말을 듣는 복희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그러나 어쩌면 때 밀던 기억이 그때 목욕탕 가서 생긴 일이었을까? 내 머릿속에서 각색된 것일지도 모른다. 추억이란 어쩌면 각자 남아있는 기억을 적당히 버무려서 생긴 건 아닐까? 

  그럼에도 ‘추억이라는 착각’에 빠진 덕분에 우리의 식사는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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