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고 미안해.
오후부터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저녁 무렵엔 장대비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우산을 안 가져간 것 같은데 비가 꽤 내려 걱정되었다. "아빠한테 우산 가져갔나 전화해봐." 큰아이는 남편과 내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한다. 크게 다툰 건 아니지만 미묘한 신경전을 벌일 때 큰아이는 눈치껏 엄마와 아빠에게 사이좋게 지내라며 서로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들을 해준다. 센스가 넘친다. 아이는 저녁을 먹으며 스피커폰으로 남편과 통화를 했다.
"아빠. 퇴근해? 비가 많이 오는데 우산 가지고 갔어?"
"아니. 우산 없어. 다른 사람한테 하나 빌렸는데 펴지지가 않네?"
"엄마가 우산 가지고 마중 나가야겠네."
"됐다고 그래라. 비 그냥 맞고 가면 돼."
통화 내용이 다 들리자 아이는 내 눈치를 봤다. 남편이 퇴근 버스에서 내리는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한번 아이에게 부탁했다. 문자를 보냈는데 답문이 없다며 아이는 전화를 걸었다. 내리는 장소를 확인하고 나에게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남편이 탄 버스가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집을 나섰다. 비가 생각보다 많이 내리고 있었다. 얄미워서 모른 척하고 나가지 말까도 생각했는데 남편은 이렇게 비가 와도 우산을 살 사람이 아니기에 마중을 나가기로 했다. 이 비를 다 맞고 온다면 감기에 걸릴 게 분명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몇 차례 버스가 지나갔다. 버스에서 내리는 아저씨들은 하나같이 뒷머리가 뻗쳐 있었다. 거북이 등껍질 같은 가방을 등에 메고 무표정한 얼굴을 해가지곤 우산을 어설프게 쓰고 각자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 때 즈음 남편이 탄 버스가 도착했다. 역시나 거북이 등껍질 같은 가방을 멘 시꺼먼 아저씨들이 우르르 내렸다. 옷 색깔도 다들 비슷하고 생김새마저 비슷해 보였다. 혹시나 놓칠까 봐 눈을 크게 뜨고 남편이 내리나 안내리나 지켜봤다. 드디어 남편이 내렸다. 열심히 자다 내린 모양이다. 우산을 건네주자 남편은 오래 기다렸냐며, 고맙다고 했다.
남편은 아이들 이야기를 몇 마디 묻곤 말없이 걸었다. 슬리퍼가 미끄러워 걸음이 자꾸만 늦어졌다. 남편은 한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의도치 않게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걷게 되었다. 오늘따라 남편의 뒷모습이 유난히 안쓰러워 보였다. 피곤해 보였다.
나는 남편이 출근하는 모습도 보지 않고 자는 불량 아내다. 남편이 출근하는 줄도 모르고 잔다. 간혹 남편의 알람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일어나지 않고 그냥 잔다. 남편은 내가 깰까 봐 조심조심 준비를 해서 출근을 한다. 일어나서 챙겨주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고 안아주기도 했던 때가 있었는데.. 이런 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것 같다.
남편은 언제나 비슷한 텐션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크게 재밌지도, 그렇다고 크게 재미없지도 않은 사람이다. 말로 표현은 잘 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나를 위해 주는 사람이다. 집안일을 먼저 해주는 사람. 내가 육아에 찌들어 짜증을 낼 때면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주는 사람. 엄마와 다툴 때면 나를 야단쳐주는 사람. 그리고 엄마의 말을 나대신 들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다. 아빠의 기일에 엄마 집에 가서도 남편은 묵묵히 엄마를 챙겼다. 남편은 내가 엄마에게 화를 낼 때 나를 말렸고, 내가 아이들을 챙기는 동안 엄마의 발걸음에 맞춰 같이 걸었다. 엄마 집 칼이 잘 들지 않는다는 말에 칼이란 칼은 죄다 꺼내서 열심히 갈았다. 쉽게 날아가 버리는 말 대신 묵직하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런 사람이다.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잊고 살았다. 늘 투덜대고 만족하지 못했다. 남편은 나에게 크게 바라는 게 없는데 나는 왜 그럴까. 비 오는 밤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미안해."
"뭐가?"
"아니. 그냥."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만큼 맞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남편. 고맙고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