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음소거, 입력전환, 볼륨 +1

by 초이

우리 집엔 오래된 것들이 많다.

덜덜거리는 에어컨, 삐걱대는 소파, 더디게 켜지는 TV.

그중 내가 가장 오래 붙잡은 건 TV가 아니라 리모컨이었다.


아버지는 집의 공기를 볼륨으로 다뤘다.

공부 이야기가 시작되면 첫 버튼은 음소거.

어머니가 예능을 켜면 화면엔 자막만 흘렀다.

말은 줄고, 눈치와 한숨만 커졌다.


나는 그 무음 속에서 또 다른 화면을 켰다.

거실 리모컨 대신 손 안의 PMP(옛 휴대용 영상기기).

겉으론 인강폴더였지만, 실제론 드라마가 담겨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음은 침묵이 아니라 순서라는 걸.

시끄러우면 잠깐 줄이고, 숨을 고른 뒤, 내 차례에 다시 켠다.

그렇게 내 인생엔 세 버튼이 생겼다.

음소거 : 비교, 불안을 잠시 멈추기
입력전환 : 남의 채널에서 내 화면으로 돌아오기
볼륨 +1 : 거창한 도약 대신 오늘 한 칸만 키우기


이 글은 그 버튼들로 살아낸 시간의 기록이다.

무음이던 집에서 시작해, 드라마 대사에 기대 버티고,

결국 내 목소리로 장면을 바꿔 온 연대기.


오늘도 전원을 켠다.

첫 화면 제목 : <음소거 : 내 순서가 올 때까지>

자막 하나를 띄운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한 칸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