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음 속에서 숨 쉬던 시절

"꿈을 꾸기라도 해보는 거야!" <베토벤 바이러스>(2008)

by 초이

학교-학원-독서실.
하루 종일 앉아 있었지만 화면은 멈춘 듯했다.
수학책은 펴졌고, 시선은 창밖 나뭇잎에 붙었다.
정확히 말하면, 못하면서 안 했다.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방법을 몰랐다.

그때 내 리모컨은 거실이 아니라 손 안의 PMP에 있었다.
겉으론 인강, 실제론 드라마.
버스에서 ‘도착할 때까지만’ 재생을 눌렀다가 종점까지 간 날도 있었다.

화면 속 지휘자의 한 줄이 스쳤다.
“... 이루라는 소리가 아냐. 꾸기라도 해보라는 거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잠시만요.”
그리고 재생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PMP를 닫자 집의 규칙이 켜졌다.
우리 집에는 늘 비교의 순서가 있었다.
성적표가 나오면 식탁 위 종이는 두 장. 먼저 언니, 그다음이 나.
큰소리는 없었지만, 그 순서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대답 대신 설거지를 골랐다.
뜨거운 물에 손끝이 벌게지는 것, 그게 그날의 전부였다.

머릿속에선 죄책감과 무력감이 번갈아 흘렀다.
‘학원비가 얼만데…’
‘근데 방법을 모르겠는데…’
그래서 버텼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채로.

겨울, 난방이 과한 독서실에선 졸음이 쏟아졌다.
그럴 땐 다시 PMP를 켰다.
누군가는 합격하고, 누군가는 사랑을 얻었다.
나는 그 장면을 따라가며 하루를 넘겼다.

그러다 어느 밤, 메모장에 세 줄을 적었다.

타임라인 5컷 = 1화
오답장 = 메이킹 필름
오프닝 10분 = 시작


실천은 서툴렀지만, 상상은 글자가 되었다.
그게 그 시절의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또 PMP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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