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 속 작은 흔적

“책에 답은 없지만, 길은 있을 거야.” <신사의 품격>(2012)

by 초이

전문대 새내기였던 봄,

처음으로 집의 리모컨이 내 손에 들어왔다.
성적표도, 계획표도, 비교도 사라졌다. 남은 건 통금 하나.
해방은 분명했지만, 편성표 없는 저녁 같았다.

무엇을 틀어야 할지 몰라 늘 뒷자리에 앉았다.
수업은 뒷줄, 과제는 마감 직전, 시험은 전날 밤.
그게 첫 학기의 채널이었다.

밤이면 라면 물을 올리고 화면을 켰다.
“책에 답은 없지만, 길은 있을 거야.”
내겐 이렇게 들렸다. ‘정답은 없어도, 방향은 있다.’
그래서 아주 조금씩 조작해 봤다.

창가 대신 벽 쪽 자리로 고정하기
밤 11시 이후 새 시작 금지
과제는 '완벽 제출' 대신 '기한 내 제출'
막히는 교재는 5 문장 요약으로 종료


거창하진 않았지만, 이 작은 조작들이 내 입력전환이 됐다.
남이 짜준 표준안이 아니라, 내가 버틸 수 있는 체질표.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뒤처진 게 아니라 시작 전일뿐이라고.
그 말이 힘이 되어 메모장 상단에 세 줄을 고정했다.
필요할 때마다 불러오는 나만의 프리셋이었다.

봄엔 결석 0을 처음 찍었고,
여름엔 미루는 날이 더 많았다.
가을엔 그 수가 줄었고,
겨울이 되자 미루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때 알았다. 다시 책을 펼 시간이었다.

성적표에 A·B는 여전히 드물었지만,
대신 예전엔 없던 것이 남았다.
결석 0회 동그라미, 마감 내 제출 체크, 발표 원고 밑줄—
작은 캡처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집안 공기도 조금 달라졌다.
아버지는 “수업은 잘 듣냐”까지만 묻고,
어머니는 “늦지 말고 들어와”로 끝냈다.
큰소리 대신, 다음 장면을 고를 공백이 생겼다.


겨울이 다가오자 대화에는 ‘자소서, 편입, 현장실습’이 늘었다.
나는 검색창에 ‘공무원 준비’를 쳤다. 이유는 단순했다. 안정.
아버지가 말했다. “세무공무원 해보자.”
회계는 C가 많았지만, 이번엔 고개가 끄덕여졌다.
‘왜’는 아직 흐릿했지만, ‘어떻게’는 배우고 싶어졌다.

이전 03화가능한 최선으로 버티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