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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재 Aug 28. 2022

나는 어떻게 시각장애인이 되었나

비장애인으로 입대해 장애인으로 전역하기까지

대학교 2학년까지 다닌 나는 남들과 비슷한 시기에 군에 입대했다. '평범한 인생'을 모토로 삼았던 나는 카투사, 통역병, 특기병 등으로 입대하는 친구들과 다르게 평범하게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했다. 남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고, 다수에 편입되어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운이 좋아 서울 한복판에 있는 부대로 배치되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순탄한 군생활을 머릿속에 그렸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원래 체력이 바닥을 기었던 나는 훈련소에서 진짜 바닥을 기어 다니며 신체적 한계를 느껴야 했다.


결정적으로, 내가 배치받은 부대는 신병들을 대상으로 추가적인 3주 간의 훈련을 실시했는데, '수호신 교육'이라고 불리는 이 교육은 응급차를 항상 대동하고 다닐 정도로 강도가 셌다. 언제든 누군가 쓰러질 수 있다는 전제 하에 하는 훈련은 배수의 진을 친 것처럼 도망칠 곳이 없었고, 왠지 도망치면 누군가에게 죽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도망쳤어야 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고 견뎌내는 것이 다수의 훈련병들에 속하는 것이었고 열외를 하고 낙오자가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 또한 열심히 아득바득 버텨냈다. 그러던 중, 수호신 교육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박 3일 훈련을 받게 되었다.


3일 동안 서울 북악산에서 걷고, 뛰고, 구르고, 쏘고, 맞추고, 싸우는데 잠은 1분도 못 자는 훈련이었다. 인간에게서 잠을 앗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때 처음 깨달았다. 몸을 한시라도 가만히 두면 잠들어버리기 때문에 계속해서 움직여야 했고, 신체의 반응 속도도 느려졌다. 야간행군을 할 때도 눈 감고 열 발짝 걷다가 뜨고, 다시 눈 감고 열 발짝 걷다가 뜨고를 반복했다.


더욱이 식수 공급도 원활하지 않아 비가 내릴 때 고개를 들어 입을 벌려 목을 축인 적도 있고, 화장실 세면대에서 목을 축이기도 했으며, 심지어 훈련장에 흐르는 시냇물에서 교관 몰래 수통으로 뜬 물을 훈련병들끼리 나눠 마시기도 했다(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다. 먹고 안 죽은 게 다행).


그렇게 고된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던 중, 동이 트는 모습을 보는데.. 뭔가 눈이 침침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날 이후로 나의 눈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작은 글씨가 잘 안 보인다고만 생각했다. 조금 지나자 글씨가 허공에 3mm 정도 붕 떠 보이는 느낌도 들었다.


'에이, 전역하면 라식부터 해야겠다.' 생각하며 하루 이틀 힘든 군생활을 꾸역꾸역 해나가다가 첫 휴가를 나갔다. 4박 5일의 짧은 휴가 중 첫째 날에 혹시나 해서 가보았던 동네 안과에서 상급 병원에 가보라는 말과 함께 진료 의뢰서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때는 짧은 휴가 기간이 안 그래도 더 짧아지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났던 것 같다.


그렇게 방문한 서울대학교 병원에서의 진료와 검사는 휴가 셋째 날까지 계속되었고, 나는 드디어 의사로부터 내 눈의 상태와 병명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황반변성의 일종인 스타가르트병. 생소한 이 문장이 내가 앞으로 영구적으로 내 눈에 장착하고 살아가게 될 병의 이름이었다.


신병 위로휴가를 보내 놓았더니 기분이 위로 올라가지는 못할망정 나락으로 떨어져 돌아온 나에게 부대 안에서의 시선은 싸늘했다. 선임부터 소대장, 중대장까지 나를 '관리'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병원 방문부터가 돌발적이고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이었다. 중대장은 이런 말까지 했다.


"너 같은 놈은 앞으로 결혼도 못 할 거다. 어떤 여자가 너 같은 놈이랑 시집오겠냐?"


다행히 나는 지금 결혼도 했고, 예쁜 딸과 셋이서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이때는 정말 내가 무언가 잘못한 줄 알았고 모든 것이 전부 다 내 탓인 줄 알았다. 그곳엔 아무도 내 편이 없었다.


그 뒤로 나는 다른 중대에 배정되어 비교적 편한 보직을 받고 군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에서도 그렇지만 군대 내에서 몸이 불편하다는 것, 눈이 잘 안 보인다는 것은 정말이지 '쓸모없는' 사람 취급받기 쉬웠다. 모두가 힘들고, 한 사람의 결원이 나머지 사람들의 충원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군대 내에서 '쓸모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과 같은 취급을 받아야 했다. 21개월의 복무 기간 동안 선임, 동기, 후임들의 그런 시선을 견뎌야 했다.


군대 내에서 다치는 경우, 의병 제대(의가사라고 주로 말하는)를 할 수 있는데 내 병은 그 대상에 해당되지 않았다. 황반변성은 서서히 진행되는 병이라, 한번 쏘아지면 실명이라는 과녁을 향해 느릿느릿하게 날아간다. 그렇기에 입대 후 7개월 만에 황반변성을 진단받은 내 눈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역 직후 의병 제대 시력 기준이자 시각장애 5급 기준인 교정시력(안경 쓰고) 양쪽 시력 0.1 이하까지 나빠져 장애 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비장애인으로 입대해서 시각장애인으로 사회에 나오게 되었다. 앞으로 더 이상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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