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선인 Jan 25. 2024

영업맨이지만, 남자가 아닙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인턴으로 입사 했다. 외산 제품을 취급하는 신생 IT 관련 회사였다. 나는 입사 초 특별한 보직이 주어지지 않아 사내에 필요한 모든 잡무를 처리했다. 당시 나는 미래에 대한 뚜렷한 목표나 목적이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회사에 머물지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설지도 결정하지 못해 갈팡질팡하였다. 

 술이라면 마다치 않고 쫓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아침엔 모닝 주, 점심엔 반주, 저녁엔 1차 맑은 물, 2차로 맥주, 3차는 노래로 마무리하는 일상이 나는 그저 즐거웠다.

 어느 날 가끔 낮술을 먹는 회사 앞 ‘공덕시장’에서 영업부장과 함께 막걸리에 전으로 점심을 시작했다. 우리 회사 영업부장은 365일 중 360일을 술과 함께 사는 분이었다. 사발로 두세 번 ‘짠~짠’을 부딪히더니 갑자기 나랑 영업해 볼래, 물으셨다. 

 “영업을요? 저는 IT 전공도 아니고 용어나 제품 지식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해요. 저는 그냥 이렇게 사람들과 얘기하며 술 먹는 것만 좋아하는데….” 

 돼지 껍데기를 추가해 막걸리에서 소주로 주종을 바꿔 2차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좋아하는 술 마시는 거, 그거 하면 돼. 너는 사람 만나 이야기 끌어내는 걸 잘하고 술까지 좋아하니 이대로만 하면 누구보다 성공한 영업인이 될 거야.”

 그날 우리는 영업인의 삶을 안주 삼아 마시고 또 마셨다. ‘영업은 여러 사람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원대로 마시는 직종’이라는 꼬임에 제대로 홀렸다. 그렇게 나는 좋아하는 술을 즐기며 일하는 IT 여자 영업인이 되었다.


내가 진짜 팔고 있는 것


특별한 교육은 없었다. 그저 부장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영업부장은 IT 전공자였다. 엔지니어 생활을 거쳐 영업을 시작했기에 IT 지식이 깊어 제품 설치도 지원할 만큼 전문가였다. 지금까지도 기술 영업인으로 인정받는 베테랑이다. 그 후로 2년, 제품 설명은 젬병이지만 술 잘 마시고 분위기 끝내주게 잡는 영업인으로 살았다. 

 나도 공부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IT 관련 책을 들추고 내부 기술자들에게 설명도 들었지만 좀처럼 진도를 빼기 어려웠다.

 “부장님! 이제 IT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책을 읽고 어떤 학원에 다니면 좋을지 조언 좀 해주셔야죠.”

 “야야, 영업맨이 무슨 공부냐? 그냥 사람 많이 만나면 된다고 했잖아. 그렇게 하면 자동으로 공부가 되는 거야. 사람이 공부고 돈이야. 머리 아프게 공부를 왜 하니?”

 나는 부장의 조언(?)을 믿고 서점과 등을 쌓았다. 대신 사람이 돈이라고 하니 일단 나만의 사람을 만들어 보자, 마음먹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만의 전략도 마련했다. 

 삼성 유니텔 통신망이 세상에 선보이자, 가상 만남의 장이 가능해졌다. 유니텔 1세대는 삼성 직원들이 많았다. 내 나이대 삼성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IT 운영이나 IT 취급 관련자들을 선별해 대화를 시작하여 만남을 유도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컴퓨터를 켜고 유니텔 채팅방에 입장하는 것이 하루를 시작하는 루틴이 됐다.

 여자가 영업한다는 것이 신기했던 건지 운만 띄우면 자연스럽게 만남이 성사되었다. 여러 번의 만남으로 친분이 생기면 제품에 관심 있거나 나에게 도움 될 만한 사람들을 소개하는 고마운 인연도 등장했다.

 나는 IT 트렌드와 관련 지식을 채팅으로 배웠다. 전문적인 고객을 만나고 싶어 IT산업 분야별 매출통계를 조사하고 전산실이 있을 만한 업체를 선별하여 TM을 진행했다. 요즘은 자기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냐고 욕을 퍼붓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난 시대를 잘 만난 영업인이었다.

 최소한 하루에 3~4개건, 누구보다도 많은 업체를 방문하려 애썼다. 일에 도움 되지 않을 고객이나 업체도 목표한 개수를 늘리기 위해 만나곤 했다. 그렇게 사람 만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영업의 기회도 찾아왔다. 하루 종일 외근 아니면 나를 찾는 전화 통화에 식사를 거를 때가 많았다. 가끔 한두 끼 못 먹어도 나는 즐거웠다. 좋아하는 일상이 일로 둔갑하니 어느덧 나는 사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열정의 아이콘이 되어 있었다. 


진심으로 부탁해


의학 박사 파멜라 피크는 직장인 남녀의 두뇌 차이를 연구했다. 여성의 두뇌는 남성보다 크기가 10% 작지만, 기능에는 차이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여성들만의 특별한 능력이 발견되었다. 감정을 느끼는 감정 대뇌변연계가 남성보다 크고 촘촘한 구조를 가졌다는 것이다. 덕분에 여성은 타인의 표정과 목소리의 억양을 인지하여 감정을 알아차리는 공감 능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멀티태스킹 능력도 탁월한 것으로 밝혀졌다. 좌뇌만 활용하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좌우뇌를 동시에 활용할 수 있어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는 태도가 훨씬 유연했다. 여성의 창의적이고 협업을 중시하는 능력도 최근 활발히 연구가 진행 중이다. 

 강한 자만 살아남는 경쟁 구도를 지나 이제는 다양한 문화에 스며드는 시대다. 서로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공감과 배려가 영업에서도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됐다. 

 “자넨 생긴 것만 여자야, 일하는 건 남자로군.”

  전에는 이런 얘기를 칭찬이라 여겼다. 심지어 여자 후배들에게 이런 조언도 불사했다.

 “우리가 남자들과 똑같은 평가를 받으려면 그들보다 120% 정도 일해야 해요. 더 잘하고 싶다면 150% 이상 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여자 후배들에게 우리가 일을 더 해야 인정받는다고 말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지금 시대의 남녀는 평등한 존재다. 아니 오히려 여성의 능력이 어느 때보다 빛을 발할 타이밍이다. 물론 바뀌지 않는 세상일의 뒷면이란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다 해도 그게 도대체 뭔 상관이란 말인가. 여자라는 사실에 주눅들 필요도, 에고에 빠질 이유도 없다. 나를 믿고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면 그뿐. 

 나는 정답으로 끌고 가는 리더보다 조직원들과 소통하고 협업해서 정답을 찾아가는 리더가 되고 싶다. 나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바른 가치관을 조직원들에게 솔선수범하고 그들에게 동기 부여를 일으켜 열정을 품게 할 것이다.

 부디 여성 영업인들이 긍정적 마인드로 열정을 다하는 자신감을 갖추길 바란다. 작은 실수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한다. 나를 낮추고 남을 공감하는 여성의 탁월한 능력을 믿어보자. 세상을 당당하게 유혹하는 능력 있는 여성 영업인과의 만남을 나는 오늘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