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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웨더" 집이 어떻다는 거지?

by 허당 써니


"하우스웨더?"

긴장과 두려움에 엄습되어 그 순간 나는 정체성을 잃고 혼란에 빠졌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른다.

새벽 5시, 미국 IT업계에서 근무하는 한국계 미국인 영어 강사와의 첫 만남. 줌 화면 속의 나는 얼어붙은 채 그녀의 첫마디를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학창 시절, 나는 맨투맨교제로 영어 문법과 독해를 공부했고, 입시 영어 시험을 무난히 통과해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외국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언어적인 감각도 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입시 커트라인 때문에 선택한 전공은 독어과였다. 독일의 문화나 교양 과목은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언어 과목만큼은 늘 최하점을 면치 못했다. 대학 시절부터 나는 영어와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았다. 그랬기에 예상대로 대기업 취업의 문턱은 높았다.


사람들과의 친밀함을 빠르게 형성하는 나의 성향 덕분에, 우연히 영업직을 선택하게 되었다. 본사는 미국 IT 제품을 취급하는 회사였고, 업무적으로 영어가 필요했지만, 정작 나는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않았다. 본사에서 손님이 와도 영어에 능통한 동료들이 주도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저 외국 손님들 옆에 앉아 반응을 살피며 아는 척 미소를 짓고 있으면 됐다. 게다가 영업인으로서 나의 가장 큰 강점은 ‘술 접대’였다. 여러 종류의 술을 섞어 건네고, 분위기를 띄우며 친밀함을 형성하는 능력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술 몇 잔이면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IT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외국계 기업의 지사에 취업하는 것을 꿈꾼다. 나 역시 여러 차례 러브콜을 받았지만, 영어 면접이라는 벽 앞에서 번번이 좌절했다. 영어에 대한 갈망은 늘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지만, ‘이 나이에 영어를 배워서 무엇하겠는가’라는 자기합리화 속에서 세월을 흘려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조사의 여성 임원이 찾아왔다.

“전무님, 본사에서 조직 내 여성인력을 확대하려고 여성 모임을 활성화하는 데 많은 지원을 하고 있어요. 다음 달부터 본사 여성 임원들이 방문할 예정인데, IT 업계의 전설이신 전무님이 참석하셔서 한마디 해주셔야죠.”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동안 영업을 하며 수많은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 왔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제는 더 이상 술잔으로 친밀감을 쌓을 수 없는 자리였다. 나 자신을 낮추며 상대에게 신뢰를 주는 태도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만, 정작 영어 앞에서는 여전히 초라한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여행을 가더라도 늘 패키지 투어에 의존해야 했던 나였다. 그런데 지금, 다시 영어를 공부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 그날 미팅에는 출장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새벽마다 혼자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는 내가 영어 하나 못하겠는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다. be동사부터 다시 시작해 문법을 익히며 차근차근 기초를 다져 나갔다. 6개월이 지나자 문법과 독해에 대한 감이 조금씩 잡혔다. 본격적으로 회화를 배우기 위해 영어 강사를 소개받고, 새벽 5시 줌을 켰다. 그리고 그 첫 수업.

“하우스웨더?”

얼굴은 분명 한국인인데, 발음은 완벽한 미국 현지인이었다. 그녀의 첫마디에 나는 얼어붙었다. 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우스’라면 ‘집’인데, 내 집이 뭐 어쨌다는 걸까? ‘웨더’는 또 뭘 더 묻는다는 뜻인가? 방 안은 겨울바람에 차가웠지만, 내 온몸에서는 땀이 흘렀다. 머릿속에서 다섯 글자가 빙빙 돌았다. ‘하우스웨더’… 이건 완전히 알 수 없는 외계어였다.

“써니 씨, 긴장하지 마세요. 천천히 생각하시면 됩니다. 잘 모르시겠어요? 종이에 적어 보세요.”

나는 종이에 ‘하우스 웨더’라고 한글로 적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전 모르겠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처음 영어를 하면 다들 써니 씨처럼 긴장해요. 괜찮아요. 모르니까 배우는 거죠.”

그리고 선생님이 천천히 다시 말했다.

“How’s weather?”

그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하우스웨더’가 아니라 ‘How’s the weather?’였던 것이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 영어 실력이 이토록 처참할 줄이야.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후 6개월을 더 공부했다. 읽기와 쓰기는 조금씩 늘었지만, 듣기는 여전히 난공불락이었다. 그래도 나는 다짐했다. 언젠가 영어가 들리는 날이 오면, 나는 반드시 ‘하우스웨더’라는 제목의 책을 쓰겠다고. 그렇게 하루하루 꾸준히 공부했고, 지금은 외국인 선생님과 1대1로 줌 수업에 도전하고 있다. 비록 아직도 말이 들리지는 않는 초부지만, 차근차근 성장해감이 느껴진다.


선생님과 일상의 루틴을 이야기하던 중, 내가 말했다.

“선생님, 저는 영어가 마라톤보다 어려워요.”

그러자 선생님이 웃으며 답했다.

“정말요? 마라톤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운동인데요. 풀코스를 뛰는 써니씨가 꾸준히 영어를 하시면 영어 실력은 바로 향상될 겁니다. 자신을 믿고 공부해보세요.” 이 말은 이제 대충 들린다.


늦게 시작한 영어 공부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결국 들리고,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수업을 앞두고 긴장하기보다 설렌다. 외국인과 단둘이 40분간 대화하는 이 시간이 뿌듯하다.

첫 ‘하우스웨더’ 앞에서 얼어붙었던 내가, 언젠가 혼자 외국을 여행하며 자유롭게 친구를 사귀는 날이 오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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