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째, 다시 내게 다가온 '주(술주)님'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이 득이고, 무엇이 해인지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주님과 함께라 여겼던 시간들이 사실은 나를 소진시키고 있었음을, 이제서야 몸이 먼저 말해주고 있었다. 주님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득이 되고 있지만, 점점 탁해지는 정신에 하고 싶은 일들은 멀어지고 있다. 절제하지 못한 삶의 반복,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어지는 2차, 3차 술자리들. 예전 같지 않게 찾아온 숙취는 주말 내내 내 몸을 침대에 붙잡아두고, 운동이며 책 읽기 같은 소중한 루틴조차 사라지게 만들었다.
책상 앞에 앉아, 그래도 무언가를 붙잡아보려 했지만, 머릿속은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했다. 굵고 단단한 장벽이 내 안에 쌓여 책의 문장을 가로막고 있었다. 위장은 울렁거리고 미식거리며, 숙취에 좋은 국물 음식을 넣어봐도 속은 점점 더 뒤집혔다. 밖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예전 같으면 이런 날 막걸리에 전 생각이 절로 났겠지만, 이제는 ‘술’ 생각조차 지긋지긋하다.
“몸을 이토록 축내는 술이 전엔 왜 그리도 맛있었을까?”
다음 주까지도 이어진 술 약속은 일이 아닌 고역처럼 느껴진다. ‘주님’과 함께하던 그 시절이 생각났다. 그땐 진심으로 즐겼고, 아무 탈도 없었는데… 그렇게 떠올리다 문득, 남편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오전 내내 주방에서 ‘베이킹소다’로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그는 청소에 푹 빠져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무언가를 닦아낼 때마다 그는 조금씩 자신의 내면의 괴로움을 지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회사를 휴직한 지 오래된 남편에게 청소는 단순한 일상이 아니라, 무언가를 견디기 위한 의식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용한 행복을 느꼈다.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 이 말이 어쩌면 남편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죄송한데 사진 한 장 찍어주실 수 있으세요?”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온 한 여성. 손에는 『날개 없는 두 천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이라는 책이 들려 있었다. 사진을 찍어드리고, 짧은 대화를 나눈 후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분이 바로 그 책의 작가였던 것이다. 소록도에서 40여 년을 헌신했던 두 수녀에 대한 이야기를 청소년들을 위해 썼다며 밝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그 두 천사의 따뜻함을 닮아 있었다.
“그 두 수녀님들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렸다. “어릴 적 친구가 충주 폐쇄 수녀원에서 평생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그 수녀원, 저도 알아요.” 서로를 향한 공감이 한순간에 연결되었다. 짧지만 깊은 대화를 나눈 뒤, 나는 책을 집어 들었다. 얇고 수채화 그림이 담긴 소설. 가격이 조금 비싸다고 느껴졌지만, 그 순간만큼은 망설임이 없었다.
머리는 둔탁하지만, 파란 하늘색의 책 표지에 매료돼 책장을 넘기며 그녀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일제 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로 격리하고 노동시키던 소록도. 그런 절망의 땅에 1955년, 오스트리아에서 온 두 젊은 수녀,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스스로 들어왔다. 그들은 ‘큰할머니’, ‘작은할머니’라 불리며, 평생을 그 섬에서 환자들과 자녀들을 돌보며 살았다. 그들의 삶은 인간의 한계를 넘은 사랑과 헌신 그 자체였다.
그 문장이 마음 깊이 박혔다.
책을 덮고 나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졌다. SNS와 유튜브를 검색하며 그녀들의 생애를 더 들여다봤다. 거룩하고도 조용한, 그러나 봉사를 위한 치열한 삶. 나는 계속 눈물이 흘렀다. 그토록 아름다운 사람들의 삶 앞에, ‘몸이 아프다’, ‘힘들다’며 징징대는 내 모습이 얼마나 하찮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사소한 봉사조차 실천하지 않고 살아온 내가, 갑자기 너무 부끄러웠다.
“이렇게 누워만 있는 지금의 나는, 어쩌면 사치 속에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눈물로 부은 눈, 더 둔해진 머리. 그런데도 나는 그 파란 책 표지를 다시 바라본다.
소록도의 하늘, 바다, 그리고 그리움. 한국을 떠나서도 소록도를 그리워한다는 마리안느와 마가렛. 그렇다면, 비 오는 소록도의 날, 그들은 얼마나 부모와 고향을 그리워했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머물렀고, 헌신했고, 사랑했다.
이제 나는 다시 나를 정돈해야겠다. 고요하게, 단단하게.
그 두 천사가 보여준 참사랑의 원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