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새벽, 미세먼지가 서울숲의 하늘을 희뿌옇게 가리고 있었다. 봄이 왔다는 신호를 느끼기엔 조금 답답한 날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달린다. 오늘은 평소보다 페이스를 조금 더 높였다. 몸은 무겁고, 숨은 차지만, 어둠 속에서 꽃봉우리가 밀고 나오는 모습을 본 순간, 이유 모를 용기가 솟구쳤다. 파란 기운과 붉은 기운이 섞인 벚꽃들이 서로를 밀치며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처럼, 나도 어딘가를 향해 뚫고 나가고 싶었다.
최근 들어 잦은 술자리와 뒤척이는 밤들로 수면은 턱없이 부족했다. 두세 시간의 짧은 잠. 결국 눈에는 다래끼가 생기고, 얼굴엔 염증이 올라왔다. 몸이 보내는 SOS.
“제발 좀 쉬어주세요.”
내 안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어제는 우리가 다루는 IT 제품 제조사를 방문했고, 오전 9시부터 조용한 카페에 앉아 관계자들과 시간 단위 미팅을 이어갔다. 그 카페는 예전엔 맞선 장소로 유명했다. 매주 한 번씩 이곳에서 나는 벤더 사람들과 하루 종일 미팅을 하며 관계를 다졌다.
“전무님, 오늘도 오셨다기에 내려와 봤어요. 정말 부지런하시네요.”
이따금 담배를 피우러 나온 직원이나, 특별히 할 말은 없어도 인사하려 들렀다는 이들을 만나며, 그날의 업무는 때때로 감정의 온기로 채워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익숙한 얼굴들은 하나둘 떠났다. 삼분의 일은 다른 벤더로, 나머지는 아예 업계를 떠나 사업자가 되었다. 여전히 나는 같은 자리에 있지만, 내 앞에 앉는 사람은 늘 새로운 얼굴이다.
30년 넘게 IT 업계, 특히 필드영업의 최전선에서 여자로 살아온 나는 문득 이런 생각에 잠긴다.
‘왜 내 주변에는 오래된 사람이 없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내가 취급하는 제품, 그리고 그 벤더 사람들과의 관계에 몰입해 살아왔다. 그들과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내 열정을 온전히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들이 타 벤더로 옮겨 경쟁사가 되면, 우리는 어느새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그렇게 인연은 멀어졌다.
"인연이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생텍쥐페리
나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 걷고 싶었다. 하지만 영업이라는 현실 앞에서 인연은 늘 방향에 따라 흩어졌다. 심지어 같은 채널의 사람들과도 경쟁 관계일 때가 많았다.
만남은 언제나 ‘오늘의 일’, ‘내일의 기회’가 기준이 되었고, 마음 나눌 여유는 점점 사라졌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아직도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시다니.”
칭찬처럼 들리는 그 말 속에서도 나는 속마음을 읽는다.
"저 독한 년, 아직도 버티네."
그래, 안다. 나는 독해졌고,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세계에서 여성은 소수였다. 주위는 늘 남자들이었고, 관계가 깊어지면 나 스스로 거리를 두었다. 이성과 친구가 되는 건 어렵다는 내 고정관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요즘 들어 여성 임원들이 눈에 들어온다. IT업계에서 유창한 영어와 박사학위, 그리고 다양한 경력을 가진 여성들. 나와는 너무 다른 길을 걸어온 이들이지만, 어느 날 그녀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깨달았다.
‘내가 걸어온 길도 결코 작지 않구나.’
오늘 만난 한 여성 채널 임원이 나의 나약해진 모습을 보며 나에게 말했다.
“전무님, 저는 이번에 MBI 대학원 졸업했어요. 하지만 전무님의 인생은 그 자체로 존경받을 만해요. 굳이 학위가 아니어도, 전무님은 이미 살아 있는 교과서 같아요. 책 한 권 내보시는 건 어때요?”
그녀의 따뜻한 말에 나는 문득, 그동안 스스로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래, 부족함을 알기에 배우려 했고, 배움을 통해 성장하려는 나.
그 자체로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겸손은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되고, 성장은 그 부족함을 마주할 용기에서 비롯된다."
지금 나는 새로운 배움의 길목에 서 있다. 그리고 그동안 막혀 있던 것들이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
벚꽃이 다시 피어나듯, 나도 다시 피어오르고 있다.
다시 어두운 서울숲을 달린다. 미세먼지가 짙게 깔려 있어도, 벚꽃은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매년 봄, 꽃봉우리들은 다시 한 번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한다. 그리고 결국, 활짝 웃는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내느냐” 이다.
나는 오늘, 이 순간도 피어나는 과정이라 믿고 있다.
지금의 열정이 미래의 나를 만들고, 지금의 태도가 과거의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겸손하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자세.
그것이 결국 모두가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가는 방법임을
나는 잊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