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는 시대의 거울이어야 한다.”
이 말을 곱씹게 된 건 치누아 아체베의 소설 『신의 화살』을 읽고 난 뒤였다. 식민지 시대라는 거대한 변화의 파도 속에서, 전통 사회의 제사장이자 정신적 지도자인 에제울루는 결국 공동체로부터 외면받고 무너진다. 그는 신의 뜻을 따르며 공동체를 지킨다고 믿었지만, 그의 고집과 자만은 오히려 공동체를 파괴로 이끈다.
에제울루의 몰락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마주한 리더십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에제울루는 자신이 신의 뜻을 대변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나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그의 권위는 점점 흔들린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조직의 총괄 매니저로 일해왔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익숙한 지위와 경험에 안주하며, ‘지금의 나’가 곧 ‘정답’이라는 착각에 빠졌던 적이 있다.
하지만 아체베는 말한다.
“진정한 권력은 사람들의 신뢰 위에 세워진다.”
권위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늘 새롭게 갱신되어야 하는 책임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하며 나를 비운다. 고요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뛰다 보면, 내가 리더이기 전에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권력은 소유가 아니라 봉사임을, 오늘도 다짐한다.
에제울루는 변화를 거부한다. 새로운 기독교 체계와 달력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끝까지 전통을 고수한다. 그 결과, 그는 공동체에서 고립되고, 결국 그가 지키려던 세계마저 무너진다.
나 역시 변화 앞에서 망설였던 시절이 있다. 특히 디지털 전환, 원격 근무, 새로운 프로젝트 관리 도구들이 등장했을 때, 기존 방식에 대한 익숙함이 나를 움켜잡았다.
그러나 팀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배우며 변화를 받아들였을 때, 조직은 더 유연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거는 배움의 뿌리고, 미래는 성장의 열매다.”
리더는 과거를 존중하되, 내일을 위한 눈을 가져야 한다.
에제울루는 ‘신의 뜻’을 내세워 공동체의 축제를 거부한다. 그 선택은 수확의 기쁨을 빼앗고, 공동체에 고통을 남긴다.
그 장면은 마치 내가 ‘경험’을 무기로 의견을 밀어붙였던 어느 회의를 떠오르게 했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나만 옳다고 믿었던 결과는 프로젝트의 지연과 불협화음이었다.
“겸손은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리더십이란 결국 ‘내가 얼마나 잘났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다.
소설의 제목 *‘신의 화살’*은 운명을 상징한다. 에제울루는 자신이 신의 도구일 뿐이라 여기지만, 그 선택은 결국 자신의 의지로 행해진 것이었고, 그는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했다.
나는 종종 외부의 상황이나 조직의 구조를 탓하며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나의 선택을 정당화하곤 했다. 하지만 리더라면, 단 한 사람의 결정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화살이면서도, 궁수다.”
선택의 화살을 쏘는 이는 결국 나 자신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더 나은 결정을 위해 배운다.
에제울루는 신의 뜻을 우선하며 공동체의 현실을 외면한다. 반면, 기독교 선교사는 공동체의 필요와 현실을 파고들며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다.
그 장면은 마치 나와 신입 직원 사이의 거리감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주는 정보보다, 그들이 처한 환경을 먼저 이해하려고 했을 때 관계는 비로소 열렸다.
“듣는 리더가 신뢰를 만든다.”
진짜 리더십은 연설이 아니라 경청에서 시작된다. 나는 오늘도 팀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의 리더십은 그들의 언어에서 자라난다.
치누아 아체베는 『신의 화살』을 통해, 변화 앞에 굳게 닫힌 리더의 파국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보여준다. 그 안에서 나는 나의 하루를 비추어 본다.
“리더란 어제의 권위를 내려놓고, 오늘의 소리를 듣고, 내일의 가능성을 키우는 사람이다.”
나도 완벽한 리더는 아니지만, 적어도 에제울루의 비극이 나의 교훈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오늘도 달리고, 듣고, 배운다. 그 속에서 진짜 리더로 자라가고 싶다.
1) 우리는 우리 것도 아닌 땅덩어리를 놓고 피를 나눈 우리의 형제 옥페리를 상대로 싸움을 일으켰네. 그런데 자네는 그 문제에 개입했다고 백인을 비난하는 군. 두 형제가 싸우면 이방인이 수확을 거두어들인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나? 233
2) 혼자라는 건 말일세, 죽은 사체가 흙과 친숙한 것처럼 내가 낯설어하지 말아야 할 것인 듯한데? 238
3) 옥페리와 우무아로의 중간 지점에 이를 때까지 날씨는 괜찮았다. 그러더니 비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쏟아질 시간이로군. 저 사람들이 은신처를 구할 집이 한 채도 없으니 말이야> 비가 오지 못하게 지탱하고 두 손을 치우기라도 한 것처럼 비가 거리낌 없이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게 쏟아졌다. 319
4) 예제울루는 자기 아들을 불러 이렇게 말해 주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 새대에 유행하는 춤을 춰야 하는 법이란다. 옥페리에 있을 때 어느 젊은 백인을 보았단다. 그는 왼손으로 글을 쓸 수 있더구나. 그의 행동거지를 볼 때 그다지 영리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힘이 있었어. 내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지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할 수 있었어. 어째서일까? 그 사람은 왼손으로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 말을 해주려고 널 부른 거다. 이 백인이 알고 있는 지식을 네가 완전히 습득했으면 좋겠다. 왼손으로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 너는 배우야 해, 난 너한테 이런 말을 꼭 해 주고 싶었단다.“
5) 위험과 맞서 싸워야 하는 사제로서의 책임까지 망각한 에제울루는 자신의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우무아로를 서서히 파멸시키고 있었다. 부족민에 대한 사랑보다 분개, 원망, 오만으로 가득한 에제울루는 사제로서의 책무보다 사제가 지닌 힘을 강조한다. 그는 대사제인 자신을 신의 화살에 비유하면서 자신이 마을에 가져온 고난이 울루 신의 의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앙은 시작되었다. 결국 신의 화실은 어디로 날아갔는가?
이 부족의 속담처럼 한 사람 또는 한 사건은 신의 의지를 나타낸다. 모든 것의 붕괴와 파멸을 본 수많은 마을 주민들은 전통적인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정한다.
6) 그러니까 개인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부족민들보다 훌륭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부족민의 의견에 반하는 결정을 절대로 얻어 낼 수 없다는 조상들의 지혜를 확인시켜 주었다. 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