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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마음을 들여다보다

by 허당 써니

“안대를 하고 있는 눈은 욱신거리고 따갑다. 피와 고름이 섞여 눈을 감고 있는 것조차 괴롭다.”

계속되는 술자리에 여행 가기전에 한번, 이번에 두 번째 눈다래끼 수술을 마치고 몇 시간째 회복 중이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자 세상이 달리 보였다.

아니,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갔다.


눈을 감고 있으니, 오히려 마음의 눈이 더 또렷하게 열렸다.

“눈이라도 번쩍 떠서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다.”

이 문장은 내가 누워서 되뇌던 말이다. 그때는 육체의 고통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삶의 갈림길에서 외치는 내 안의 목소리였다는 걸 안다.


미국에서의 가족 여행은 기대와는 달랐다.

“엄마, 제발 나가지 마세요. 여긴 시골이에요. 위험해요.”

아들의 다급한 목소리. 나는 매일 뛰고 싶어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남편은 시차에 지쳐 잠에 빠지고, 아들은 과제에 매달려 도서관에 박혀있다 시피 했다.

나는 늘 그렇듯 식탁에 홀로 앉아 혼술을 했다.

“그래도 가족이 함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외로웠다. 외롭다는 감정이 다시 나를 감쌌다.


일터로 돌아온 나, 복귀하자마자 기다리는 것은 밀려든 업무였다.

눈에 스크래치가 난 듯하고 고름은 계속 부풀어오르지만, 업무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전무님, 이번 입찰… 저희 제품은 너무 비싸서 SI들이 꺼려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익숙한 고민. 가격이 전부가 되어버린 IT 영업의 현실.

수많은 설득과 신뢰가 단 한 번의 투찰에서 무너지는 순간을 얼마나 많이 경험했던가.

한 참을 듣고 있던 나는 말했다.

“그냥 싸서 사는 시대야. 우리가 팔고 싶은 게 아니라, 남들이 사줄 수 있는 것만 팔아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지.”

언젠가부터 IT 영업은 마진이 아닌 생존의 싸움이 되었다.


나는 ‘내가 만약 당장 일을 못하게 된다면’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일을 그만두면 내가 쌓아온 권력, 명예, 경력은 내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돈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그건 ‘지금 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행복은 일이 끝난 후에 오는 게 아니라, 일하는 그 순간에 숨 쉬고 있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문장처럼, 나는 지금 이 순간 일을 하기에 존재의 의미를 느낀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삶의 방향을 되돌아봤다.

아프고, 멈춰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일을 놓을 수 없을까?’

그건 단지 경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일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낀다.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길, 배우고 싶은 것도 많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욕망이다.

눈물이 흘렀다. 고름 섞인 눈물인지, 감정의 눈물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눈물은 나를 깨어나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본다.”

— 아나이스 닌


지금, 나는 한쪽 눈이 감겨 있지만 마음은 훨씬 넓게 떠 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전보다 더 따뜻하고 명료한 시선으로 나를, 그리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신의 삶에도 ‘눈을 감고 있는 순간’이 있나요?

그 고요함 속에서 당신만의 소리를 듣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다시 눈을 뜰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눈은 더 깊어졌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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