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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가 아닌,
살아 있음의 감각

by 허당 써니

오하이오의 어느 조용한 새벽에

“엄마, 전화도 안 받고 납치라도 되신 줄 알았어요.”

아들의 말에 잠에서 깼다.
미국 중서부, 조용한 시골 마을. 낯선 땅에서의 하루가 아들의 걱정으로 시작됐다. 어젯밤 7시에 숙소로 들어와 깊은 잠에 빠졌고, 새벽 1시 반에 눈이 떠졌다.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2시 반. 시차에 뒤틀린 몸은 아직 이곳의 리듬에 적응하지 못했다.

불을 켰지만, 노란 호텔 조명은 책을 읽기엔 어두웠다. 하지만 잠들지 못한 새벽, 가방 속에 넣어온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꺼냈다. 그리고 그 첫 문장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살아 있다는 감각에 전율을 느꼈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들이 진짜로 찾는 건 살아 있음의 경험입니다.”

이 문장은 내가 요즘 자주 던지는 질문,
‘나는 지금 살아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 같았다.


나는 매일 달리고, 글을 쓰고, 읽고, 일하고, 고민한다.
이 루틴 속에서 나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여기에, 이 멀고 낯선 곳까지 오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남편을 깨워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반쯤 잠에 취한 채 세 접시를 퍼담는 남편. 나도 모르게 그만큼을 따라 담았다. 그렇게 먹다 보면 꼭 배탈이 난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하마처럼 아무 말 없이 많은 양을 급하게 먹어 치웠다. 주변 가족들의 눈빛이 느껴졌다. “쟤네, 남편은 기린처럼 길고, 아내는 사무귀처럼 얇고 말랐는데 저 먹거리를 다 먹을 수 있는 거야?”

우리는 남들 눈에 그렇게 보였겠지. 마지막 커피 한잔에 과일과 쿠키로 조용히 입가심을 했다.

남편과 나는 사귈 때부터 급하게 포식하는 습성이 비슷했다.

그리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배가 불렀지만 10km는 뛰어야 했다.

그건 나에게 운동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 같은 것이니까.


아들의 학교를 함께 둘러보는 날이었다.
넓은 캠퍼스는 고요했고,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미술관, 도서관, 잔디밭…
이 광활한 공간 속에서 대학 시절을 보낸다는 건, 어쩌면 선택받은 자들의 특권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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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친구들도 만났다.
해맑고 순한 얼굴들. 왠지 다 내 아들 같았다.
그리고 삼겹살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미국에서는 미성년자라 술을 못 마신단다. 나는 맥주 한잔을 들고 아이들은 무료로 주어진 얼음물을 들고 건배했다. 부모와 함께하는 자리는 괜찮겠지 했지만, 이곳은 확실히 한국과는 다른 법의 세계다.


밤이 되어 숙소로 돌아오니, 남편은 곧바로 깊은 잠에 빠졌고,
나는 조용히 맥주 한 캔을 따며 하루를 정리했다.
그러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내 루틴은 무너졌다.


항상 시간을 쪼개 살아오던 나.
요즘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여유롭게 산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그 ‘하고 싶은 일들’이 ‘해야만 하는 일’로 변해 있었다.
열정은 집착이 되었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시간을 아끼며 사는 삶이 어느 순간 나를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잠자고 있는 남편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1년째 휴직을 하며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자는 남편과, 모든 걸 하려다 번 아웃 되어 지금 잠만 자는 나. 우리는 무엇이 얼마나 다르다고 생각해야 할까?’

남편은 요즘 정말 잠만 잔다. 처음엔 공황 때문이라 생각했고, 이해하려 애썼다. 나중엔 화도 났다. 왜 저렇게 아무 의지도 없이 살아갈까? 하지만 이번 여행의 목적은, 그 남편과 다시 연결되기 위함이었고, 아직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큰 맘먹고 아들의 학교를 찾아 여행을 오게 된 것이다

그래 좀 더 기다리고 지켜보자.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존엄하다.

그가 누구든, 어떻게 살든.”

이 말은 나 자신을 위한 위로이자,
아직은 지켜보고 싶은 남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조셉 캠벨은 말했다.

“모든 사물은 나와 동일하며, 우리는 하나이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도 없지만, 살아 있음의 순간은 어디에나 있다.”

이 문장은 오늘 하루를 통째로 품은 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 이 여행에서, ‘쉬는 법’을 배우고 있다.

창밖의 나무와 하늘을 그냥 바라보며,
졸리면 자고, 마시고 싶으면 마시며
계획 대신 감각으로 살아가는 연습을 해보려 한다.


오늘 아침, 윗입술에 물집이 생겼고 눈엔 다래끼가 더 커졌다.
어쩌면 내 몸이 보내는 신호는 이렇게 말하는지도 모른다.

“괜찮아, 넌 지금 살아 있어.”

살아 있음의 감각에 귀 기울이는 하루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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