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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비행기, 넓은 마음

by 허당 써니

“좇됐다.”

그 한마디로 시작된 여정이었다. 델타 항공기 맨 뒤편, 세 자리의 좌석을 향해 남편과 나는 조용히 걸었다. 창가 자리를 남편에게 내어주고 중간 자리에 앉았지만, 그의 긴 다리는 자연스레 내 공간을 넘었다. ‘12시간 40분, 참을 수 있겠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던 찰나, 덩치 큰 흑인 승객이 기체 입구로 들어섰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예감은 언제나 정확하다.

“Excuse me.”

그는 내 옆 좌석의 주인이었다. 남편보다 두 배는 더 긴 다리, 어깨는 넓고 체구는 웅장했다. 나는 기린과 코뿔소 사이에 낀 사마귀가 되어 다리를 모으고 허리를 세운 채, 침묵 속에서 12시간을 버텼다.

비행은 마치 돼지우리에 갇힌 듯했다. 움직일 수도, 잠들 수도 없었다. 음식은 계속 밀려왔고, 그 옆 사람은 화장실 한 번 가지 않은 채 묵묵히 먹기만 했다. 나는와 남편은, 결국 초식동물에서 천천히 돼지로 변해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디트로이트.

육체는 무거워졌고 머리는 더욱 둔탁했다. 입국심사 줄 앞에서, 나와 남편은 묘한 긴장 속에 서 있었다. 한 한국 청년이 질문에 당황하다가 노트북을 뒤지더니 이내 다른 공간으로 이끌려가는 장면은, 낯선 땅에서의 현실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남편은 여행 전 프린트해 둔 영어회화 문장을 툭 건넸다.

“나 요즘 영어공부 하잖아. 잘할 수 있어. 걱정 마.”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내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운이 좋았다. 말이 많지 않은 심사관이 우리를 불렀고,

“Where will you be staying?”

“What is the purpose of your visit?”

나는 준비된 대답을 차분히 내뱉었다.

“Visiting my son. He is a university student.”

“Okay.” 심사관의 마지막 멘트가 끝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린트 끝에 써 있던 영어문장을 남편은 낮은 목소리로 내뱉는다.

“Have a nice day.”


문을 통과한 순간, 벤치에 앉아 게임에 빠진 아들이 보였다.

“넌 미국까지 와서도 게임만 하냐.”

“엄마는 보자마자 또 잔소리세요.”

서로가 서로를 기다렸지만, 표현은 어색하고 단단했다.

그래도, 그 순간.

나는 팔을 벌려 아들을 안았고, 그 아이도 내 품에 안겼다.

그제야 우리의 재회는 온전해졌다.


아들은 생애 첫 차인 소나타를 몰고 우리를 태웠고, 넓디넓은 미시간의 풍경은 피로를 씻어냈다. 말없이 앉은 남편은 아들과 차에 대한 대화를 나눴고, 나는 뒷자리에서 흐뭇하게 바라봤다. 조용히, 천천히 가족은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들른 한국 부대찌개집. 김치, 햄, 고기, 그리고 뜨끈한 국물은 온몸에 퍼졌다. 나는 소주 한 병을 시켜 조심스레 홀짝였고, 남편은 술을 못 마시고, 아들도 예전 내 술 시범(?) 이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엄마는 며느리가 술 좀 할 줄 알았으면 좋겠어.”

아들에게 늘 하던 말이지만, 오늘 같은 날은 특별히 더 같이 먹을 사람이 있으면 했다.


그날 밤,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피로에 젖은 채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남편은 그대로 뻗었고, 아들은 기숙사로 돌아갔다. 나는 맥주 한 캔과 초콜릿 하나를 꺼내며 오늘을 정리했다.

“가족이란, 서로를 위해 문을 열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


디트로이트. 자동차의 도시,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재건이 공존하는 곳.

그곳에서 우리의 여행이, 재회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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