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다는 것은 고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고독의 시간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 고독에 있을 때 그 고독을 터치하지 않는다. 바보들만이 "무슨 일 있어? 얘기해봐" 한다.
'쓰리 빌보즈'로 잘 알려진 마틴 맥도나 감독의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가 이런 상황을 탁월히 다룬다.
콜린 파렐이 분한 '파우릭'은 아일랜드 외딴 섬에서의 평생의 절친 '콜름'으로부터 자신은 이제부터 고독할 시간이 필요하다라며 일순간 절교를 통보받는다. 영화는 바이올린의 현을 짚어야 하는 콜름의 다섯 손가락을 걸고, 이 무참한 통보의 이유를 자못 섬찟하면서도 곡진하게 설득해 나간다.
고독한 자에게 다가감은 젖은 날개를 말리고 있는 매미에게 입김을 부는 것과 같다.
그는 외롭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고독으로 날아간 것이다.
그가 고독하다는 것은 자기의 내밀한 시간을 갖는 중이란 것이고 그건 타인과의 접점에서 잠시 떨어져 가능한한 온전히 자기가 돼 에너지를 충전 중이란 것이다.
너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라도, 그에겐 절대적으로 고독할 시간이 필요하다.
고독을 터치하는 자는, 그래서 고독을 방해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고독을 헤아려 본 적 없는, 그래서 타자에게 이입하지 못하는 예민하지 못한 바보, 그 이하란 오해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파우릭의 잘못이 거기에 있다. 파우릭은 주민들로부터 사람은 참 좋지만(nice), "dull", 즉 둔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그렇게 콜름과 파우릭의 파국적 갈등을 통해 <고독할 권리>를 준엄히 일갈한다. 자유의 뒷면에는 고독의 절대적 그림자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오직 고독한 자만이 살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