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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나라의 정원사 Feb 29. 2024

책, 종이, 가위

히로세 나나코 감독

광케이블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지금, 사람들은 모든 정보나 필요한 자료를 인터넷에서 구한다. 가장 빠르고, 쉽고, 어디서나 검색할 수 있는 손안의 요술상자는 디지털 만능시대에서 이길자가 없어보인다. 이러한 시대에 북 디자이너 기쿠치 노부요시의 등장은 이제 앞으로 종이책이 없어지는 시대에서 어떤 의미인지 영화는 질문하고 있다.<책, 종이, 가위>는 종이북 디자이너 기쿠치 노부요시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다큐다. 38년간 책에 표정을 입히는 일을 하고 있는 그는 최첨단 기계앞에 무색할 정도로 종이를 가위로 오리고, 폰트를 만들고, 직접 염색하는 일을 한다. 

 영화는 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여명으로 알려진 신예작가 히로세 나나코의 첫 다큐 영화인 셈이다. 그녀의 연출은 마치 책을 자신의 몸처럼 생각하는 진중한 장인을 닮아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연출은 섬세하고 따뜻함이 배어있다. 실제로 감독의 아버지도 이런 일을 했다고 들으니 감독이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갖고 만들었는지가 느껴진다. 카메라는 장인이 일하는 모습을 비추기도 하고,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마시고, 중고시장에서 디자인이 될 수 있는 모든 소재를 찾아가는 일상을 천천히 따라간다. 그는 아직도 발로 뛰며, 손으로 하는 모든 것들을 찾아서 영감을 얻는다. 철저히 아나로그 삶을 지향한다.

 영화는 총 7개의 챕터로 나눈다. 진열하고, 자로 재고, 연결하고,찾고, 묶고 만나며, 놔주는 과정까지 기쿠치 노부유키의 삶과 철학이 영화에 오롯이 녹아있다. 영화는 마치 한권의 책을 연상시킨다. 그는 우선 주문이 들어오면 책에 대한 내용을 숙지한다. 책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면 이미 그 책은 작가의 것도 아닌 독자의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는 읽는다는 행위는 글로 대화한다라고 표현 한다. 대화가 시작되면 책을 디자인 하기위해 준비하는 출발점이 된다. 종이책은 소설의 몸이다. 디자인의 골격은 책의 핵심 문장을 기억하게 하고, 그에 꼭 맞는 폰드의 옷을 입히며, 피부에 맞는 색을 입힌다. 또한 그는 책의 질감을 피부라고 말한다. 책에서 느껴지는 질감을 만지며, 코로 냄새맡고, 얼굴에 대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전자책이 감히 따라오지 못하는 종이책만의 절대 감성이다. 종이책은 오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감독이 말한 지점도 바로 이 것이다. 새책에서만 느껴지는 활자 냄새라던지, 빳빳한 종이질감과 색감 때문에 전자책과의 차별성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감성때문이라도 종이책은 절대 죽지 않는다고 했다.

 카메라안에 들어온 그는 7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각이 젊으며, 아이디어가 반짝인다. 그의 손 끝에서 소설이, 시가, 인문학의 활자들이 서서히 표지를 입고 깨어난다. 그가 입혀진 표지의 옷은 절제와 공백과 단어사이의 거리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그가 표지에서 가장 고민하는 것은 여백이다. 제목이 가진 무례함을 걷어내고 되도록 작가가 표현하려는 의도는 공백이 담당한다. 장인이 걱정하는 것은 새로운 창조에 대한 갈증이다. 작가도 오래 글쓰면 자기모방 하듯이 장인도 늘 자기 모방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 

 이 영화의 미덕은 한길을 고집해온 장인이 이루어낸 성과가 그냥 물리적인 시간위에 얹어진 결과가 아니라는데 있다. 찾는다란 챕터안에 중고시장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도자기 위에 그려진 문양하나, 오래된 나무 액자걸이에서 이야기를 건져올리는 그는 단지 직업인으로서만 비춰지지 않는다. 그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투시력을 가진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감독은 기부치가 쓴 책을 보고 책을 디자인하는 일에 매력을 느껴 북디자이너인 기쿠치 노부유시로 정했다고 한다. 이번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만난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행에 처지고 트랜드를 못 읽어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그 일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는 분명 이시대의 귀한 장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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