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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나라의 정원사 Mar 01. 2024

해변도서관에서

도서관 올라가는 계단에 서면 마음이 설렌다. 계단 위에 있는 둥근 창이 푸른 바다를 품고 있다.  독서회를 인연으로 이곳 해변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다. 멀리 오륙도가 보인다. 유람선이 그림처럼 떠 있다. 지나간 여름, 유람선에서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흥겨운 가락에 배도 덩달아 파도에 춤을 추었다. 배가 지날 때마다 야성을 잃어버린 갈매기들은 사람들이 뿌려주는 새우깡을 졸졸 따라다녔다. 빨간 파라솔로 넘쳐나던 바다는 이제 하얀 모랫바닥을 보이고 마치 묵언 수행하는 스님을 닮아있다. 나는 가을 바다를 좋아한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생각이 깊어진다. 바닷가에 뿌려진 사연들은 어떤 사람에겐 시가 되고 눈물이 된다. 언제부턴가 도서관에 자원봉사하면서 주변의 상황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것이 내게 특별한 느낌으로 와닿는 데는 그다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제는 비가 왔는데 이른 아침임에도 바다를 서성이는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그 남자를 바라보며 나는 정채봉 작가의 “눈물이 모여서 바다가 이루어졌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는 어떤 심정으로 이 아침바다를 서성거릴까? 복잡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먼 곳에서 첫 기차를 타고 숨 가쁘게 달려오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시린 가슴을 위로받고 싶어서 비가 오는 바닷가를 서성이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 한편 아련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는 그렇게 하릴없이 바다를 걸어 다니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바닷가 중앙에는 조형 미술품이 전시되었다. 가을에만 열리는 전시회다. 바다로 향해있는 철길은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철길 하나에도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나는 바다로 들어가는 기차를 생각한다. 어떤 아이는 땅을 넓히고 성을 높이는 모래성 쌓기에 빠져있다. 발이 저리도록 쪼그리고 있던 아이는 그 모래성에 꿈을 쌓고, 허물기를 반복한다. 모래성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엄마 손에 끌려가는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이는 허물어져 가는 모래성을 한 번 더 뒤돌아보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저녁 해가 꼬리를 물고 바다 밑으로 떨어질 즈음 어디서 애잔한 색소폰 소리가 들려온다. 양복 차림의 노신사는 붉은 기운이 도는 하늘을 향해 악기가 뱉어내는 긴 울음을 토해낸다. 바다 위에 불기둥이 타오르고 가슴 밑까지 저리는 색소폰의 음률은 잊었던 내 아픈 기억을 훑고 지나간다. 막내 고모의 죽음이다. 열여섯 나이에 경험했던 고모의 죽음은 내 삶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고모의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바다를 좋아했던 고모는 사랑의 열병에 앓았던 한 남자와 바다 한가운데로 조용히 걸어갔다. 고모는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세상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모는 마지막 순간에 손을 잡아준 남자와 같이 떠났으니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은 말할 수 있다. 한집에서 매일 밥을 먹고 이야기했던 고모가 왜 말없이 바다로 걸어가 버렸는지……. 지금은 일상이 되어버린 바다에서 나는 마음껏 소리 내어 고모를 부른다. 바다는 고모가 흘린 사랑의 눈물방울도 함께 흘러간다. 


그렇게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벤치 위에 앉아있는 노인들을 만나게 된다. 내기 장기에 한 많은 시름과 일상의 고단함을 쏟아내던 노인들의 굽은 등 뒤로 길었던 하루해가 잠시 머뭇거린다. 노인들은 장기판에 시선을 떼지 않는다. 그들에게 석양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면 지는 해는 자신들의 처지인 양 서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노을은 언제나 짧아서 아쉽다. 해가 기우는 이때쯤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는 노인 부부를 볼 수 있다. 몸이 아픈 할머니를 위해 할아버지는 언제나 자기 팔을 빌려 주곤 한다. 할아버지 팔에 의지한 채 힘겹게 옮겨가는 걸음이 불안하다. 서로를 의지한 채 한 몸으로 산책하는 노부부는 이미 우리가 관계에서 고민하고, 작은 일에 분노하며, 물질에 탐닉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띄우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아픈 배우자를 향해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고 산책하는 일이야말로 내가 최후에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결혼생활이 아닐까. 해 질 무렵 산책하는 사람들은 바다와 함께 풍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일과가 끝나갈 즈음, 바다는 다시 조용해지고 도서관에서 바라다본 풍경에서 나는 인생의 희, 노, 애, 락을 느낀다. 누구나 한 번쯤 젊은 날의 로맨스로 거쳐 갔던 해운대. 어떤 사람은 이곳에서 죽을듯한 시련의 아픔을 경험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결혼하면서 새롭게 의지를 다지는 곳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의 위기에 몰려 자살 직전에 삶의 끈을 놓은 마지막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 바다는 이미 일상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공간이다. 앞으로의 인생에 같이 걸어갈 바다 같은 친구가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바다는 내게 어떠한 해답도 주지 않는다. 거저 들어주고 내 마음을 다독여주기만 할 뿐이다. 이렇게 멋진 계절, 바다와 마주하게 되면 바다는 내게 얽혀있는 문제를 풀어준다.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방법으로 말을 걸어준다. 바닥까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고 슬픔을 토해내다 보면 나는 어느새 왜 여기에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진다. 바다는 그런 품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기치 않는 벽에 맞닥뜨리게 되면 나는 언제나 도망가기가 바빴다. 무서워 숨기만 했다. 하지만 이젠 피하고 싶지 않다. 당당하게 지금처럼 바다를 향해 맞서겠노라고 생각한다.


 오늘 바다는 더욱더 눈부시다.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 삶의 철학으로 남아서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나는 그들을 통하여 내 안에 곪은 상처를 드러내고 다시 재정비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단단해져 가는 것을 느낀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는 저녁 시간, 진솔한 삶의 풍경에 나도 모르게 눈가가 젖어온다.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로 가슴이 더워진다. 어느덧 해는 사라지고 열어놓았던 도서관 창문을 닫는다. 붉은 바다 위로 짧은 하루가 어둠 속으로 잠긴다. 자원봉사가 끝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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