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 아내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결혼 30주년, 30여 년 직장생활 끝의 정년퇴직, 다가오는 나의 환갑 등등 묘하게도 기념할 일이 겹치면서 우리 부부가 스스로에게 주는 인생의 휴가였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인내하고 양보하며 살아준 아내에게, 그리고 한 직장에서 30년을 잘 버티며 가족들을 먹여 살린 남편에게 서로가 주는 선물이기도 했다.
전체 여행 기간 59일 중 실제로 순례길을 걸은 기간은 34일, 그러나 나는 사진을 찍거나 메모하는 등의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이 특별한 휴가 기간에 뭔가를 기록하느라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그 순간, 그 공간에 오롯이 머물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어쩌면 나의 직업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정확히 말하자면 졸업하기도 전인 87년 11월, 나는 KBS에 PD로 입사했다. 그 후 30여 년간 항상 무언가를 기획하고 촬영하고 편집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풍경이든 사람이든 사회현상이든 나에게 펼쳐진 대상을 바라보면 어떤 앵글에서 어떻게 찍을까, 어떻게 편집하고 어떻게 구성할까를 나도 모르게 계산하는 버릇이 생겼다. 멋진 풍경을 만나면 어디에 어떤 카메라를 배치해서 어떤 영상을 얻을지가 떠오르고,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라도 나눌라치면 나도 모르게 인터뷰를 하기 일쑤다. 어떤 공간, 어떤 상황에 놓일 때 온전히 그곳에 속하기보다는 이걸 2차원의 화면에, 혹은 프로그램이라는 가상세계에 재구성하는 버릇이 직업병처럼 생긴 것이다. 이렇게 주인공이 아니라 관찰자로 30여 년을 살아왔는데, 그런 직장을 벗어나서 홀가분하게 떠나는 첫 휴가에 이 못된 버릇을 가져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나는 기억과 사진을 뒤적이며 여행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코로나 때문일 것이다. 스페인 순례를 마치고는 터키나 중국 실크로드, 혹은 베트남과 라오스를 배낭여행하기로 아내와 계획을 세웠는데 꼼짝없이 집에 머물게 됐다. 학생들에게 간간이 영상 제작도 가르치고 시간이 나면 아내와 속리산 둘레길과 집 주변의 임도를 걷는 일상들도 꽤 괜찮기는 하지만 낯선 외국으로 배낭여행을 가고 싶다는 욕구는 어쩔 수가 없다. 문득 여행기를 쓰면서 스페인 순례길을 한 번 더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행은 참으로 짜릿한 경험이었다. 문화재로 지정될 법한 수백 년 된 오래된 집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선 오래된 마을들, 하늘과 지평선과 길(까미노)이 한 점에서 만나는 광활한 들판, 그 길을 아무 생각 없이 터덜터덜 걷다 보면 문득 하늘과 땅과 내가 하나가 된 느낌, 처음 보는 낯선 여행자에게 아무런 마음의 벽도 격식도 없이 툭 툭 말을 건네 오던 스페인 사람들, 모두가 놀라움과 감동의 순간이었고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 감동과 울림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욕망이 꿈틀댔기 때문이다.
알찬 여행 안내서를 기대한 분들에게는 많이 부족한 내용일 것이다. 사진과 기억, 그리고 순례길을 안내하는 인터넷의 도움으로 1년 전을 재구성하기는 했지만, 여행 안내서로 읽기에는 부정확하거나 부족하다. 차라리 순례 과정에서 떠오르는 단상들을 기록한 로드 에세이 정도로 가볍게 대해주길 바란다. 내용들이 지나치게 사적인 상념 들일 수도 있겠지만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있기를 기대하면서 순례를 떠나보자.
1. 왜 산티아고지?
“여보, 산티아고 순례길 갈까?”
정년퇴직을 하고 어디를 갈까 뒤적거리는 중이었다. 터키도 가고 싶었고 실크로드와 티베트도 가고 싶었고 소수민족들이 산다는 베트남 북부도 가고 싶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문제는 시간만큼 돈은 여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비싸지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유럽인데, 그래서 스페인은 사실 여행지에서 비교적 뒤에 자리한 후보 선수였다. 그런데 지나가는 투로 던진 말에 아내의 반응이 즉각 돌아왔다.
“그래, 좋아”
이쯤이면 끝난 거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좀 더 가깝고 싼 여행지로 바꾸자는 것은 첫째 자존심이 상할뿐더러 승산도 별로 없다. 바로 스마트폰을 켜고 항공권을 검색했다. 두 달 뒤에 떠나는 파리 경유 항공권이 왕복 105만 원, 뭐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가격이다. 고민 없이 예약했다. 말 꺼내고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다. 신용카드번호를 넣고, 자리를 지정하고 나니 서서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 것이다. 음, 내가 말로만 듣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구나. 나중에 들어보니 아내도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단다.
그래, 가슴이 설렌다는 말은 내 영혼이 격하게 공감했다는 말이고 제대로 선택했다는 뜻 이리라. 실제로 내 인생에 중요한 결정들은 거의 다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아내를 만난 첫날, 몇 시간 만에 프러포즈를 했다. 가슴이 설레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무언가에 취한 듯, 홀린 듯 이 여자가 내 아내라는 믿음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몇 분간 시간을 달래더니 아내도 받아들였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아내도 꽤나 직관적인가 싶다. 아예 결혼식 날짜까지 잡아버렸다. 남들은 너무 성급하다고 난리들을 쳤지만, 나는 그 성급해 보이는 결정이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결혼 후 집을 살 때도, 차를 고를 때도 거의 이런 식이다. 때로는 뜻밖의 손해를 본 경우도 있지만 후회는 안 한다. 남의 의견을 고려하고 실패할 것까지 미리 걱정하면서 뭔가를 결정한다면 도대체 내가 누구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말인가?
산티아고 순례길이 나와 아내의 가슴을 설레게 만든 진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스페인이 매력적인 이유를 몇 가지 들어 볼 수는 있다. 첫째 나와 아내는 걷기를 좋아하고 자유여행을 좋아한다. 유명한 관광지를 편하게 돌아다니며 가이드에게 설명을 듣는 패키지여행을 어쩌다 가긴 했지만, 그건 시간이 부족한 월급쟁이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나의 취향은 아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대략 800km를 걷는다고 하니 많이 걸어서 좋고, 가이드가 없으니 자유롭고 호젓해서 좋다.
둘째로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럽이나 미주대륙이나 다른 어디를 가더라도 열흘 남짓 패키지여행에 여행사에 내는 비용만 5-600만 원인데, 이리저리 알아보니 산티아고 순례길은 40일 넘게 여행해도 300만 원이면 충분하단다. 미리 말하자면 우리 부부는 파리를 거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남부 세비야와 인근 지역, 포르투갈까지 59일을 여행하면서 모두 1200만 원 정도를 썼다. 한 사람당 600만 원 정도인 셈. 적은 돈은 아니지만 패키지여행 열흘 정도에 드는 비용으로 두 달 가까이 여행한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매력적인 세 번째 이유는 오래된 나라, 오래된 길이라는 점이다. 오래된 길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숨결과 이야깃거리가 잘 익은 김치처럼 충분히 녹아있다는 말이요, 오래된 나라라는 것은 천편일률적인 현대 도시와 건물이 아니라 낡고 정겨운 집과 마을이라는 뜻이다. 공간 여행에 시간여행까지 보태진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순례길이다 보니 어쩌면 영적인 여정까지도 경험할 수 있는 여행지라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알다시피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분,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중세 시대인 11세기 무렵부터 유럽 사람들의 대표적인 성지 순례지였다. 당시 한 해 50만 명 정도가 순례길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단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구원을 갈구하며 걸었으니 구원의 길이요,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고 오면 죄를 사해 주기도 했다니 속죄의 길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도 산티아고 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넘으며 자신만의 위로와 답을 찾는다고 하지 않는가? 독실한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이런 구원과 속죄의 길을 걷다 보면 어쩌면 영적인 여정의 맛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지는 않을까, 하다못해 30년간 자라서 30년간 직장 생활하고 마지막 30년(?) 은퇴생활을 시작하는 내 인생의 전환점에 어떤 점이라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게 하는 여행지다.
그러고 보면 산티아고 순례길은 걷기 좋아하고 자유여행 좋아하고 돈도 아끼고 싶고 영적인 부분에도 관심 있는 우리 부부의 여행지로 최상의 조건을 갖춘 종합 선물 세트라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이런 이유들은 나중에 생각해낸 것들이니 여행지로 주저 없이 선택한 것은 그저 산티아고라는 말이 가슴을 설레게 했기 때문이라고 해두는 게 좋겠다.
2. 뭘 준비할까?
자, 이제 항공권을 예약했으니 여행 준비의 절반은 끝났다. 나머지 절반의 준비에 돌입했다. 우선 여권을 체크했다. 다행히 여권 만료일은 1년 이상 남아있다. 필요한 정보를 모았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코스 안내와 여행기들이 넘쳐난다. 70%의 순례자들이 선택한다는 프랑스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일단 숙소와 안내판이 잘 돼 있고 길도 편하단다. 파리를 경유하며 은근슬쩍 프랑스 여행을 보탤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하루에 대충 20km 남짓 걷는다며 미리 걷는 연습을 충분히 해 두라는 조언도 많다. 뭐 평소에도 하루 6-7km씩은 걷고 있는 터라서 크게 걱정은 되지 않지만, 평소보다 시간과 거리를 조금 더 늘려서 꾸준히 걷기로 했다. 외화 환전도 환율을 봐 가며 미리미리 해 놨다. 물론 유로화로.
문제는 준비물이다. 여행기를 읽어보니 준비물에 대한 목록들이 나온다. 계절에 맞는 옷들, 우의, 침낭, 손전등, 여행안내서, 비상약품들, 스틱, 배낭, 편한 신발...... 여기에 빈대를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감쌀 커다란 비닐, 벌레 기피제, 스마트폰에 붙여 쓰는 접이식 키보드, 외국어를 척척 통역해준다는 통역기까지 준비했다. 아내는 고추장과 화장품에 샴푸까지 가져가잔다. 어차피 스페인에서도 사야 할 것들이니 아예 가져가자는 말이다. 신발은 무거운 중등산화가 아니라 편하고 가볍고 방수되는 트레킹화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새 걸로 장만했다.
신발 선택은 정말 중요하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낡아서 버린 신발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때로는 나무나 탑에 매달아 놓기도 하고, 돌무덤을 만들어서 예를 갖춘 것들도 있다. 그만큼 신발이 고생한다는 말이다. 요령을 말하자면 약간 큰 신발을 준비해서 미리 신고 걸으면서 발에 맞추는 과정이 필요하다. 순례길을 걷다가 만난 한국의 한 젊은이는 순례를 떠나기 얼마 전에 비싼 중등산화를 사서 신었다는데, 안타깝게도 발에 딱 맞고 딱딱해서 발에 물집이 심하게 잡힌 경우를 봤다. 중간에 같은 숙소(알베르게)의 같은 방을 쓴 적이 있는데 하도 안타까워서 등산화를 한국으로 보내고 새로 한 켤레 사 신으라고 조언을 했지만, 아깝다며 그냥 걷겠단다. 결국은 도착지인 산티아고에서 만났으니 그 신발로 완주를 하긴 했지만,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싶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물품들을 챙겨보니 아내의 배낭은 12kg, 내 배낭은 18kg이다. 여행기를 보니 배낭 무게가 체중의 1/10, 최대 10kg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문제는 뭐 뺄 것이 없다. 80 리터 배낭에 짐을 머리 위까지 구겨 넣어 등에 져 보니 듬직하니 견딜만하다. 아내에게 큰소리쳤다. 여보, 이거 별거 아니네. 걸을 수 있겠어. 아무렴, 내가 누군가? 젊을 때는 30kg 배낭에 손에는 물통까지 들고 산으로 다녔는데 이 정도는 약과지.